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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都承旨(도승지)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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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都承旨(도승지)비서실장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7.09.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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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이제 더 욕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도리어 배워야 한다. 폭정과 찬탈, 당쟁으로 얼룩진 허약한 왕정국가 조선이 그래도 600년 역사를 유지한 것은 직언하는 참모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견제받지 않고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의 문무백관, 유생들에게는 언로(言路)가 틔어 있었다. 직언을 할 수 있는 언로가 뚫려 있었기에 부패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폭군의 집정기에도 충신들이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하고 직언을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적인 장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3중 장치가 대간(臺諫), 감찰, 암행어사다(‘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를 막았을까’, 이성무). 대간은 관료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대관(臺官)과 국에게 간언을 하는 간관(諫官)을 합쳐 부른 말이다. 대관은 사헌부, 간관은 사간원 소속이다. 조선에는 왕에게 간언을 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삼사(三司)가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다.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은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와 좌·우 승지가 6조의 업무를 맡아 왕을 보필했다.

그중에서도 사간원 간관의 임무와 권한은 막강했다. 고려시대에 확립돼 조선으로 이어진 간관은 국왕에게 바른말을 하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삼았다. 간관이 오래도록 간언을 하지 않으면 직무 소홀로 처벌받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엔 간관이란 단어가 총 1750회나 등장한다.

특히 폭군의 시대에 급증한다. 연산군 때 144회, 광해군 때 112회다. 간관의 활동이 그만큼 활발했다는 뜻이다. “간관이 임금에게 있어서는 마치 질병에 약석과 같은 것입니다. 약석을 물리쳐 버리고 질병이 위독해지지 않는 일이 드문 것처럼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국가를 망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광해군일기 11년 5월) 간관은 왕에게 화원(花園)을 꾸미는 역사(役事)를 그만두라고도 하고 풍악을 울리고 나들이 가는 것을 말리는 등 사소한 간언부터 목숨을 건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바른말을 간하다 간관들은 왕의 미움을 사 사직하거나 좌천을 당하고 때로는 옥에 갇히고 극형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간관을 두고서도 그 말을 듣지 아니한다면, 이것은 임금이 스스로 그 이목(耳目)을 막는 것입니다.” 간관의 언로를 보장하라는 사간원의 상소문(태종 2년 6월) 내용이다.
 
영조 때 도승지였던 번암 채제공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하자 왕의 곤룡포를 붙잡고 “사도세자를 죽여서는 아니 되옵니다”라며 죽음을 무릅쓰고 말렸다. 훗날 영조는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채제공이)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했다.

이 시대에 목숨과 직위를 걸고 간언을 할 수 있는 조선의 충신 같은 관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도끼에 맞아 죽더라도 바르게 간하고 가마솥에 삶겨서 죽더라도 옳은 말은 다하면 이 사람은 충신이다.” 동진(東)의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 나오는 말이다. 이의 반의반에 해당하는 자세만 가져도 이런 비참한 시국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국애민(憂國愛民)의 마음이 넘쳐 도끼를 메고 죽음을 각오하며 상소를 올리는 조선이 그리운 것이다.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의 폭정도 조선의 선비정신 때문에 제어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 정종 2년(1400)에 설치해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 폐지했다. 그 후 승정원이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으로 쓰다가 지금은 대통령 비서실(장)로 통칭한다.
 
도승지를 도령(都令) 또는 도도령(都都令)이라 한다. 현재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된다. 속담에 ‘거지가 도승지를 불쌍히 여긴다’라고 한다. 이는 추운 겨울 새벽이나 밤중에도 왕의 부름이 있으면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을 본 거지가 저런 도승지보다 내가 더 편하다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조선 태조 1년(1392)에 중추원의 속아문의 도승지를 그 장관으로 삼았다가 태종 5년(1405)에 별도의 승정원을 둬 도승지(정3품)라는 관직을 뒀다. 그 후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 때 폐지됐다. 그동안 승정원의 명칭이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등으로 자주 바뀌었고, 이승만부터 ‘대통령 비서실’이라 했다.
 
도승지는 당상관(3품)에 속하지만 그의 위치는 의정부나 6조, 사헌부, 사간원과 같이 국정의 중추기관으로 권력이 대단하다. 승지 중에서도 수석승지를 도승지라 하며, 왕을 가까이 모시는 직책으로 조정의 인사권을 좌우한다. 따라서 정승이나 이조판서의 권력과 비등하다. 역대 유명한 도승지는 황희, 성삼문, 신숙주, 유성룡, 이이, 체제공, 홍국영 등이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왕실의 치정(治政)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록돼 지난 1999년 4월 9일에 국보 303호로 지정했고, 2001년 9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승정원일기>는 주로 왕과 각 부서들 사이에 소통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왕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대해 동태나 기분까지도 기록돼 있다. 예로 들면 영조는 ‘이렇게 일 때문에 골치를 썩는 것은 내 팔자’라 한 내용도 적혀있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지난 박근혜 대통령이 구속될 때 이를 보좌하던 당시의 비서실장(도승지) 김기춘은 법정에서 토로하기를 “제가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구속까지 됐는데 비서실장으로 정치적 책임을 통감한다. 차라리 특검에서 재판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고 하 독배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이로 보아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위치의 자리에 있는 비서실장의 처신 여하에 국운이 달려있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나라 시인 양만리(楊萬里가 월계(月桂)에게 읊은 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 세삼 뇌리에 떠오른다.
 
광복 이후 비서실장을 역임한 분은 3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은 임기가 없으며, 대개 1년 내외를 맡았다. 그중 짧게는 4개월, 길게는 9년을 맡았다. 이승만 정부 때는 윤보선이었고, 박정희 정부 때는 김정렴이다. 그는 9년이나 장기간 국민소통이 있었으나, 박근혜 정부 때 허태열은 4개월, 김기춘은 18개월의 임무를 맡았다. 현 문재인정부에는 임종석이 비서실장을 맡고 있어 국민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갈지 의문이며, 비서실장 역량에 따라 국운이 달렸다는 것을 국민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하던 당시의 비서실장(도승지)’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은 연산군 때의 환관(宦官) 김처선이다. 왕의 음란행위에 극간(極諫)을 하다가 혀와 다리를 잘려 죽으면서도 직언을 중단하지 않았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이 있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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