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가통계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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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가통계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느냐”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 승인 2018.09.0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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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표 전 경제수석이 재임 중 보건사회연구원 등에 통계청의 1·4분기 가계소득 통계를 반박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정책 실패(소득분배 악화)의 책임을 통계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비판을 낳고 있다. 그 결과 통계오류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했다.

국가통계기관이 발표한 공식통계의 재검증을 통계 비전문기관에 의뢰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두 가지가 잘못됐다. 하나는 통계 불신을 조장한 점이다. 국가(청와대)가 통계청을 안 믿는데 어느 국민이 믿을까. 다른 하나는 경제를 정치로 해결하려 한 점이다. 통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통계청에 얘기하고 설득해 바로잡는 방식을 취했어야 한다. 문제의 통계에 소득주도성장에 불리한 내용이 들어 있어 강하게 반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치는 무엇으로 하는 걸까. ‘논어’에 답이 나온다. 자공이 정치를 물었다. 공자 왈 “먹을 것을 풍족히 하고(足食), 군사를 강하게 하고(足兵), 백성이 그것을 믿는 것(民信之)이다.” 다시 물었다.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먼저 군사를 버리고, 다음에 먹을 것을 버리라고. 그리고 못을 박는다. “백성이 믿지 않으면 바로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

믿음은 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믿음을 잃으면? 난장판이 되고, 결국에는 망한다.왕의 시호에 충(忠) 자를 붙인 고려 후기. 역사의 암흑기다. 왜 그럴까. 1276년, 충렬왕 심(?)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홀도노게리미실을 아내로 맞았다. 제국대장공주라고 한다. 21년 뒤 홀도노게리미실은 갑자기 숨졌다. 세자 원(?·충선왕). 어머니 죽음을 충렬왕의 총비 무비의 소행으로 여겨 무비와 환관 수십 명을 벴다.

개경 만월대는 피바다로 변했다. 왕에 오른 충선왕, 7개월 만에 쫓겨났다. 다시 왕위를 차지한 충렬왕, 며느리인 보탑실린공주를 개가시키라고 외쳤다. 고려의 ‘난장 정치’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오로지 원 황실에 줄을 대고, 모략과 참언으로 날밤을 새웠다. 그런 역사는 공민왕 때까지 80년 가까이 이어진다. 공민왕도 피살됐다.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이때 나온 말이다.

믿음? 그런 것은 없다. 백성의 믿음? 생길 턱이 있겠는가. 백성이 편한 나라? 그런 것도 없다. 수탈을 당해도 하소할 곳이 없고, 왜구가 나타나도 지켜줄 사람이 없다. 무신(無信)이 판을 친 결과다. 몽고 전란의 피해가 클까, 난장 정치의 폐해가 클까. 그래서 암흑기라고 한다. 고려는 어찌 됐을까. 망했다.믿음을 잃은 역사. 우리가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통계 논란. 악성이다. 왜? 짧은 역사에 쌓은 알량한 믿음의 토대조차 흔드는 사건인 탓이다. 통계청을 믿지 못한 청와대. 통계청장을 바꿨다. 황수경 전 청장, 노동운동을 하고 30년 동안 노동경제를 연구한 학자다. 노무현정부에서도 활약했다. 코드가 맞지 않았던 걸까. ‘저소득 가구가 더 가난해졌다’는 통계가 문제였다. 신주 모시듯 한 소득주도성장 구호에 금이 간다고 생각했을까. “통계가 잘못됐다”고 했다. 고용·투자·소비 지표가 모두 ‘나락에 떨어진 경제’를 알리는 판에 어찌 소득 지표만 장밋빛이기를 바라겠는가. 상식이다.

통계청장에 앉힌 사람은 대통령이 “최저임금 긍정 효과가 90%”라는 황당한 말을 하도록 한 가공 통계를 만들어 준 바로 그 사람이다. 강신욱 청장. 하필 왜 그를 앉혔을까. 통계 방식을 바꾼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까.

황 전 청장, “제가 그렇게 말을 잘 들었던 편은 아니다.” 윗선에서 무슨 말을 한 걸까. 통계청 직원들, “우리는 밥 먹고 표본 만드는 것이 일이다. 오류는 없었다.” “일부 직원들은 통계 중립성 훼손 우려를 청장에게 전했다.” 통계청장을 바꾼 날, 노조는 성명을 냈다. “통계 공정성과 중립성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조치”라고.

이제 누가 국가통계를 믿을까. 멀쩡한 통계조차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을까. 무신 풍조가 꿈틀거린다.청와대는 왜 그랬을까. 벤저민 디스레일리,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윈스턴 처칠, “내가 만든 통계만 믿는다.” 그 말을 믿은 걸까. 디스레일리는 1800년대 후반 영국 정치가요, 처칠은 1900년대 중반 영국 총리다. 낡아도 아주 낡은 유행가다.

지금은? 서구 민주주의와 경제정책은 ‘투명하고 공정한 통계’ 위에 서 있다. 함부로 조작하지 않는다. 통계 독립성을 중앙은행 독립성만큼이나 중요시한다. 왜 그럴까. 나라의 통계가 정치에 오염되면 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국민의 배를 불리는 정치, 국민을 배고프게 하는 정치를 재는 잣대는 바로 통계다. 통계를 조작한다면? 난장의 시대가 도래한다.

‘입맛에 맞는’ 사람을 통계 수장에 앉힌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걸까. 인생을 통계에 바친 통계청 분들은 물었다.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느냐.” 국정운영과 정책의 바로미터인 통계는 정확성과 신뢰성, 객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 어떤 정치적 이용이나 시도는 절대 용납돼선 안 될 것이며 국민 모두가 이를 견제해야만 할 것이다.
 
자료는 정직함을 생명으로 여긴다. 정직한 자료를 근거로 제대로 분석하고 예측해야 한다. 대학입시를 비롯한 교육정책 등에서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통계를 이용해 온 사례가 계속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통계가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가 되거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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