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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의 비움이 인생 최고의 승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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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의 비움이 인생 최고의 승리자다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9.27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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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과학의 발달이 엄청난 변혁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원초적 고뇌에는 변함이 없다. 인과에 의해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가야 하는 이 실존적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착하기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도 만족해하는 존재, 악하기로 말하자면 동전 한 잎에도 목숨을 빼앗아 버리는 잔혹한 존재. 도대체 어떤 것이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일까.

예로부터 수행자들은 이 '마음의 근원'을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던졌는데 이들을 운수납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천하를 유행했다. 남루한 누더기에 걸망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었고 버리려 해도 버릴 것이 없고, 가려 해도 가야 할 곳도 없는 그 지극한 오도의 세계를 향한 나그네이었던 것이다.

선의 마음은 진여의 마음이다. 마치 삼라만상이 명경에 비추듯이 마음의 거울 또한 모든 것을 비춰 준다.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 이를 깨달은 자라 한다. 그러나 마음의 근원을 망각하고 헛된 욕심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중생이라 부른다. 인간에게는 다소의 외부지향적인 면이 있다. 자신에게 결여된 점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일종의 콤플렉스이다. 이 사고가 확대되면 언제나 진리는 바깥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조물주(造物主)가 창조해낸 가지각색의 만물들이 어우러져 자신을 뽐내며 살아간다. 우주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삼라만상에 영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인 듯하다.

달도 차며 기울고 꽃도 피면 지고 열매도 익으며 떨어지고 사람도 익으며 떨어진다. 요즘은 늙어간다는 말보다 익어간다는 아름다운 말을 사용한다. 대자연 속에서 숲속을 주름 잡는 것은 산신령이나 산속의 사자나 호랑이 이고 바다 물속을 주름잡는 것은 고래나 상어이고 인간세상을 주름 잡는 것은 무엇일까? 명예와 권력을 쥐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것이 인간세상이지만... 하지만 인간세상을 주름 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과실이 익으면 떨어지듯 인간도 익으면 내려와야만 한다. 현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와 명예가 일찍 찾아와서 선점한 사람도... 늦게 찾아오는 대기만성형의 사람도... 세상사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 나에게 부귀영화가 일찍 찾아왔다는 것은 내려가야 할 시점도 일찍 도래한다는 것이다. 사회 혹은 직장에서 일찍 진급한 사람은 행복한 삶이 나에게 일찍 찾아왔으나 내려올 날도 일찍 다가온다는 것이고 아직 잡지 못한 사람은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언젠가는 그에게도 다가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찌감치 거머쥔 부귀영화는 조만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의 마음으로 맡겨진 일에 임해야 한다. 즉 된사람의 덕목은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근본으로 겸손과 사양을 미덕으로 베푸는 삶을 실천하며 된사람으로 거듭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은 세상만사 차오르는 모든 것은 조만간 비워야 한다는 의미의 끽휴시복이란 잘 익은 알찬 사자성어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끽휴시복이란 어떤 의미이며 유래는 무엇인가? 청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인 판교(板橋) 정섭(鄭燮)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끽휴시복(喫虧是福)은 밑지는 것이 복이다라는 뜻으로 이익만 따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해 보고 마음의 평화가 얻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이셨던 소강절(邵康節) 선생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무엇이 화(禍)이고, 무엇이 복(福)입니까? 선생이 답하였다.

내가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화이고, 남이 나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복이다. 즉 끽휴시복(喫虧是福), 밑지는 것이 복이고 가득참은 손해의 조짐이고, 빈 것은 채움의 출발점이다. 내가 손해를 보면 남에게 채워지겠지만 밖으로는 사람간의 정리가 평화로워지고, 안으로는 내 마음이 평화롭고 편안하니, 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익만 좀스럽게 따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해 보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더 좋음을 비유한다.

청나라 때 판교(板橋) 정섭(鄭燮)이 유현(v縣) 현령으로 있을 때 일이다. 고향의 아우가 편지를 보내왔다. 집 담장 때문에 이웃과 소송이 붙었으니, 현감에게 청탁해 이기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섭은 답장 대신 시 한 수를 썼다. '천리 길에 글을 보냄 담장 하나 때문이니, 담장 하나 양보하면 또 무슨 상관인가? 만리 쌓은 장성은 여태 남아 있지만, 당년에 진시황은 보지도 못했다네.(千里告狀只爲墻,讓他一墻又何妨. 萬里長城今猶在,不見當年秦始皇.)' 이와 함께 '끽휴시복(喫虧是福)' 네 글자를 써 보냈다. 밑지는 게 복이라는 뜻이다. 그 아래 쓴 풀이 글은 이렇다. '가득참은 덜어냄의 기미요, 빈 것은 채움의 출발점이다. 내게서 덜어내면 남에게 채워진다. 밖으로는 인정의 평온을 얻고, 안으로는 내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 평온하고 편안하니, 복이 바로 여기에 있다.(滿者損之機, 虧者盈之漸. 損於己則盈於彼, 外得人情之平, 內得我心之安. 旣平且安, 福卽在是矣.)' 아우가 부끄러워 소송을 포기했다.
 
세상만사 욕심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요? 사람이 태어나 죽음을 목전에 두어야 움켜 쥐었던 주먹을 펴고 빈손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는지? 조선 후기 문신인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은 성대함은 쇠퇴의 조짐이고, 복은 재앙의 바탕이다. 쇠함이 없으려거든 큰 성대함에 처하지 말고, 재앙이 없으려거든 큰 복을 구하지 말라. 떵떵거려 끝까지 다 누릴 생각 말고, 조심조심 아껴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야 그 복이 길고 달다.

그리고 재앙은 부엌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배고픈 개처럼 틈을 노린다고 하였다. 세상살이는 마음의 비움이 인생 최고의 승리자라는 의미이다. 허나 이런 글귀의 참 뜻은 알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않은 것이 비참하고 힘들다. 그래도 힘든 세상일수록 마음속에 끽휴시복을 되새기며 살아가도록 조금이라도 노력한다면 내가 행복하고 나와 나의 후손에게 평온과 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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