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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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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 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9.09.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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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처서(處暑)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처서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계절의 엄연한 순행을 드러내는 때이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공기는 언제 무더위가 있었느냐는 듯 시치미 떼고 있다.처서가 지난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조상들은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꺼내 말리는 포쇄(曝)를 이 무렵 했다고 한다.
 
결혼식 장례식 등 세상의 모든 의례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제’일 것이다. ‘의례의 부재’는 ‘의미의 부재’가 된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전 단계에 통과의례가 빼곡한 이유다. 추석 전 조상 묘에 무성하게 자라난 풀과 잡초를 제거하는 벌초 행사도 한국인들의 중요한 의례다.

이맘때면 50대 이상 중·노년층은 물론이고, 20~40대 젊은 층과 어린 학생들까지 벌초 길에 줄줄이 동행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벌초는 제례의 한 절차지만, 손위 어른이 모처럼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다. ‘토요일 아침 9시까지 벌초 집합’이라는 문자 한 통이면 전국 각지 후손들이 새벽을 가르며 모여든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마디 훈계도 섞어 넣을 수 있다. 봉분에 잡풀이 무성한 것 자체를 불효로 인식하는 관행이 아직도 뿌리 깊다.
 
조상을 잘 섬겨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마치 민간신앙처럼 아직도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다. 제사를 지내고 성묘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주술적 기복(祈福)의 효(孝)사상인 셈이다. 특히 자손들이 이름을 떨치고 큰 재산을 모으는 것은 조상의 묘를 얼마나 정성스레 모시는 가에 달려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추석 성묘를 앞둔 벌초(伐草)는 집안의 중요한 행사였다.

잡초를 뽑고 잔디를 깎는 벌초는 처서부터 시작돼 이슬이 내리고 가을기운이 완연해지는 백로 무렵에 절정을 이룬다. 요즘이 그 시기여서 주말이면 낫과 예초기를 들고 시골을 찾는 사람들로 고속도로가 붐빈다. 조상의 묘를 방치한다는 것은 곧 불효자로 치부되는 것이어서 가능한 손수 벌초를 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벌초하기가 말같이 그리 쉽지 않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인데다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아서인데,이를 벌초대행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민간 전문업체들이 성업중인가 하면 시ㆍ군 지역의 산림조합과 농협에서는 실비만을 받고 가까운 거리의 벌초를 대행하고 있기도 하다. 조상의 묘를 모시는 것은 비단 벌초만이 아니다. 사초(莎草)라 해서 훼손된 묘지에 잔디를 입히는가 하면, 성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분'(掃墳)이라 해서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그 사연을 고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매장이란 장묘문화에서 벌어지는 풍습들이다.

매장을 고집하던 인식이 달라지면서 이러한 풍습들도 해가 갈수록 시들해지고 있다. 화장률이 높아지면서 납골당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주된 요인이다. 화장 후 유골을 나무뿌리에 안치하자는 '수목장'(樹木葬) 운동도 앞으로 매장문화를 바꿔 놓을 것 같다. 수목장은 환경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일종의 자연장 캠페인으로 유럽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장묘문화가 어떻게 바뀌든 조상을 받드는 일만은 소중하게 지속돼야 할 것이다. 더욱이 도덕과 윤리가 무시되고 있는 현실이어서인지 벌초를 하는 정성 하나도 의미있게 느껴진다. 1844년 흥선대원군은 충남 예산 천년고찰인 가야사를 불태우고 경기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가 있으며, 홍성 오서산에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왕의 자리를 택했다. 가야사 터에 묘를 쓴 덕인지 1863년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른다. 이후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에 연루돼 고종이 물러나고, 손자인 순종이 등극했다. 공교롭게 예언대로 두 명의 왕을 배출했지만 조선은 멸망했다.매장문와 명당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조상 묘를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자손의 명운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은 동양 문화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명당의 기본인 풍수지리는 땅의 기운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 짓는 이론이다. 풍수는 조선 전기 도읍지·절터·집터를 정하는 양택(陽宅)에서 조선 후기 조상의 묏자리를 찾는 음택(陰宅)으로 변했다. 좋은 묘를 쓰려는 욕심에 남의 땅에 몰래 장사 지내는 투장(偸葬)까지 성행했다.

명당은 특히 권력자의 관심을 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에 연이어 실패하자 유명한 지관으로부터 명당을 소개받아 1995년을 전후해 부모 묘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명당 효과였는지 2년여 후 대통령에 당선됐다. 명당이 많다고 알려진 용인에는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 등 정·재계와 종교계, 문화계 유명 인사들의 묘가 즐비하다. 추석을 앞두고 조상 묘의 풀을 베어 정리하는 벌초가 한창이다.

후손이 정성을 표현하는 전통이며 중요한 집안 행사다. 이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제 가운데 하나가 풍수다. 명당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 득실을 넘어 후손의 발복을 기원하는 내리사랑의 기대다.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하면서 장례문화는 화장이나 수목장으로 변하는 추세다.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벌초도 기억에서 사라질 날이 머잖은 듯싶다. 올해는 다행히도 처서 무렵에 태풍도 우리나라를 비껴가고 날씨도 대체로 좋았으니, 풍년이 들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경사(慶事)가 많기를 기원하여 본다.

일본의 악랄한 경제보복, 우려되는 한·미 동맹,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5월 이후 9회나 거듭된 북한의 발사체 도발 등 사면초가에 빠진 경제, 외교, 안보위기에 사력을 다해 대처하고 극복해야 할 때, 법무장관 후보자 문제로 온 나라가 박탈감과 허탈감에 빠져 홍역을 치르며 갈등과 소모전을 하느라 국력을 탕진하고 있으니…….
 
여름 내내 기승을 부리던 폭염도 처서를 지나고 물러가고 결실의 계절도 다가오는 것처럼, 매사 법치주의에 순행하며 기본이 바로 서고 상식과 원칙이 바탕이 되어 희망차고 행복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다. 

정선/ 최재혁기자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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