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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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행복
  • 최재혁기자
  • 승인 2019.11.2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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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그동안 보지 못한 늦은 가을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앙상해진 나무, 바람에 날리는 낙엽, 그리고 높은 하늘까지, 한참을 마주해 본다. 요즘, 도종환의 시집 ‘슬픔의 뿌리’에 실린 ‘단풍 드는 날’이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여름 나무는 더위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역시 나무의 가장 멋진 모습은 단풍으로 물든 때일 것이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현재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욕심이 많은 탓이다.

욕심이 클수록 행복은 더 멀리 도망간다. 반대로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을 줄이면 된다. 비움의 미학은 바로 욕심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얻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명성을 쌓고, 더 날씬한 몸매를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했던 목표를 달성했건만 행복하기는커녕 두려움과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허전해지고 더 외로워진다. 이유는 바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 결국 행복하려면 욕망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추해지고, 불행해진다.

나무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기 위해 푸르름을 벗어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오. 또한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낙엽으로 변할 준비도 하고 있다고. 겨울 준비를 하기 위해선 잎만 버리는 게 아니라오. 줄기가 변하고 겨울에 먹을 영양분을 저장하기 위해 뿌리를 단단히 하고 있지요.이처럼 비움의 미학은 버릴수록 풍부해지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바둑에서 최선의 수를 찾으려면 청심과욕(淸心寡慾) 즉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내라’고 했다. “묘수 세 번 두면 바둑 진다”라는 격언은 묘수를 내야만 할 정도로 형세가 불리하다는 뜻이지만, 묘수를 반복하다 보면 자칫 꼼수나 무리수가 되고 결국 스스로의 함정을 파는 자충수(自充手)가 된다는 뜻이다. 세상살이에서 변법 또는 변칙을 쓰다가는 제 꾀에 넘어가 일도 그르치고 자신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심한 방책은 묘수처럼 보여도 꼼수가 되고 결국에는 자충수가 되어 혼란을 초래한다. 경제에는 특별한 묘수가 있을 수 없는데 묘기나 재주를 부리다가는 낭비와 비효율로 낭패 당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끈 경제 재난들은 대부분 욕심 사나운 권력이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묘수를 내려다가 초래한 재앙이었다.

몇 가지 쉬운 예를 들어보자. 경기를 지나치게 부양하려는 과욕으로 ‘절약의 역설’을 외치며 카드 사용을 통한 과도소비를 유도하다 ‘2003 카드대란’ 사태를 촉발시켰다. 가계부실을 초래하고 소비수요기반을 흔들리게 하였다. 초단기로는 경기를 부추기는 묘수였는지 모르지만 결국 한국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 사태 시발점이 되어 경제성장 동력을 훼손시키는 자충수로 변했다.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격언은 경제순환에는 묘수가 없다는 의미다. 무릇 가계·기업·국가 경영이 성공하려면 경제흐름을 역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현실을 무시한 대책은 무리수나 자충수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조금만 멀리 생각한다면, 오늘날 한국경제 위험과 불확실성의 진원지는 경기침체가 아니라 성장잠재력 추락이다.

경제현실에 버거운 ‘소득주도성장’이 의지나 구호와 반대로 성장잠재력을 잠식시키는 자충수가 될까 두렵다. 기업이 이윤추구동기로 재화와 용역을 ‘더 싸게, 더 좋게, 더 빨리’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일자리가 생겨야 성장잠재력이 확충된다. 나랏돈을 화수분이라 착각하고 생산 없는 일자리를 무수히 만들어내면 성장잠재력은 퇴락할 수밖에 없다. 위기는 날벼락처럼 오지 않고 곪고 곪은 문제들이 쌓였다가 터지는 것이다.

‘자충수(自充手)’란 바둑에서 자기의 수를 줄이는 돌, 즉 상대방에게 유리한 수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스스로 한 행동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며 ‘자업자득(自業自得)’과 같은 뜻으로 쓴다. 비슷한 예로 ‘그는 실언을 해서 자충수를 두는 꼴이 되었다’, ‘대외 통상 문제에 대한 쇄국적 입장은 자칫 세계적 개방의 흐름 속에서 고립을 자초할 수 있는 자충수가 되기 쉽다’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자충수란 말을 한자 그대로 풀어 보면 ‘스스로 채워 넣는 수’라는 뜻이 된다. 스스로 빈 곳을 채워 넣는데 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불러올까? 그에 대한 답은 바둑의 속성에 있다. 바둑은 집을 많이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데 그 집이라는 것이 바둑판에선 빈 공간이다. 자신의 돌이 둘러싼 빈 공간이 많아야 이기는 것이다. 결국 비워야 할 공간에 돌을 채워 넣으니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가지고 산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많이 채우고 싶어한다.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많이 채우면 그 모든 게 자기 것이 될 거라 생각한다. 어떨 땐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해선 안될 일도 한다. 정치인은 권력을 이용하고, 경제인은 재력을 이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쁜 거짓말로 욕망을 채운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채우기에 급급해 비우려 하지 않는다. 반면 정당하게 욕심 내지 않는 사람들은 채운 만큼 비우려 하는 경우가 많다. 욕심 내지 않으니 채워지는 것의 일부를 들어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묘수가 자주 등장하는 조직이나 사회에서는 어느덧 불신풍조까지 생겨난다. 사람들의 마음을 반죽하려는 ‘립 서비스’나 연출은 과거에는 묘수로 통했는지 모른다. 정보의 전파속도가 빛처럼 빠른 사회에서는 자칫하다 헛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꼼수나 자충수로 변할 수 있음을 깨우쳐야 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심리위축은 경제순환에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욕망이 큰 사람들은 어떤 것을 채우면 또 다른 어떤 것이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빠져 나가는 것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떨 땐 채워넣은 것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것들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사람일 수도, 다른 또 어떤 것들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것을 채우려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결국 자충수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마음이 맑은 어떤 날에 문득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생각난다면 그날은 채우는 것보다 한번 비워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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