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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처럼 반복되는 전.현정권 갈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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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처럼 반복되는 전.현정권 갈등사
  • 서정익기자
  • 승인 2015.02.02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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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회고록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계기로 숙명처럼 반복돼 온 현재권력과 과거권력 간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가 재삼 주목받고 있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정착되면서 역대 집권세력은 전임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신구(新舊) 권력간 갈등을 노정했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파워 게임은 차기 정부로 이어지며 전·현 권력간 갈등을 잉태하게 됐다. 오랫 친구로 우정을 쌓았던 사이도,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왕년의 민주화 동지끼리도, 정치를 가르치고 배운 사제관계도 ‘정권의 이름’으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MB 회고록’ 충돌, 9년 갈등 연장선= MB 회고록을 둘러싼 전·현 정권의 충돌은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시작된 갈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숙명의 라이벌이었고, 이후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갈등은 여권 권력지형도를 그려내는 일종의 방정식처럼 자리 잡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18대 총선 ‘공천학살’이 벌어지면서 친이는 당내 주류로 자리잡았고, 소수파인 친박은 내부 결속력을 다지며 친이에 대항했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박 대통령의 ‘어록’은 이때 나왔다. 양측 갈등의 정점은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부결 사태였다. 이 전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위해 2009년 9월 충청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이는 미래권력(박 대통령)에 대한 견제 카드로 정치권에 회자됐다. 이에 당시 친박계는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하며 원안을 고수했고, 박 대통령은 2010년 6월 국회에서 직접 수정안 반대토론에 나서며 부결을 끌어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양측의 갈등은 박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신구권력간 충돌로 발전했다. 2013년 1월 퇴임을 앞둔 이 대통령은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등 측근을 특별사면했고,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는 “모든 책임은 이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 물고 물린 전·현 정권 갈등사 = 전·현 정권간 견제와 충돌의 관계는 멀게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간 애증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당시 전 전 대통령은 후계자이자 친구이기도 한 노 후보에게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정권재창출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이른바 ‘5공 청산’에 나섰고,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 성명과 함께 백담사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호랑이굴’로 들어갔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하나회 숙청을 통해 전임 정권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특히 5·18 특별법 제정 등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임 대통령인 노 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전 전 대통령까지 구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나에 대한 수사는 정치보복”이라는 내용의 골목성명을 발표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도 신구권력 갈등은 예외없이 되풀이됐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책임 규명을 위한 경제 청문회를 진행하면서 민주화 동지이면서도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문민정부 경제라인이 대거 기소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청문회 증인 채택에 반발하며 출석을 거부했다. 후일 김 전 대통령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청문회에 나오라는데 나를 모욕주려는 자리에 왜 나갔겠는가”라며 당시 갈등을 술회한 바 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진보정권 재창출의 역사를 썼지만, 같은 뿌리의 신구 정권은 여야 관계 못지않은 갈등을 빚었다. 노 전 대통령이 출범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함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던 남북정상회담 의미는 퇴색했고, 박지원, 임동원 등 김 전 대통령 핵심 측근들마저 줄줄이 구속됐다. 특히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분당 사태에 이어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정점에 달했고, 이 때부터 형성된 친노-비노간 대립구도는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보수정권으로 다시 정권교체를 이룬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직후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전·현 정권간 갈등은 계속됐다.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할 때 김해 봉하마을로 갖고 내려간 대통령 기록물 반환을 요구했고, 노 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절도죄”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노 전 대통령은 “궁색한 내 처지가 실감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다”는 편지를 이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던 무렵 급기야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수사대상에 올랐고, 이는 검찰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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