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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플레이스 54] ‘아카시아 양봉 메카’ 영천 지역발전 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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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플레이스 54] ‘아카시아 양봉 메카’ 영천 지역발전 호재
  • 영천/ 윤석중기자
  • 승인 2020.05.24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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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은 지금 - 핫플레이스 54]
달콤한 벌꿀이 흐르는 영천

우리나라 양봉 역사는 고구려 동명성왕 때 재래종벌인 동양종꿀벌(Apis cerana)이 원산지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수렵과 함께 자연에서 열매를 채취해 먹이를 해결하면서 바위 틈이나 큰 나무의 구멍에서 달고 진한 꿀을 발견했을 것이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함에 따라 정착영농의 시대로 발전하고 이 때부터 사유재산의 개념이 생기면서 꿀벌의 소유가 양봉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양봉의 기원은 자생적일 가능성이 높다. 문헌상으로 가장 괄목할 만한 기록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양봉기술이 꿀벌과 함께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태자 풍(豊)이 꿀벌 4통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양봉 기술을 일본에 전해준 기록이 나온다. 그 뒤 발해와 일본과의 교역에서 꿀을 주요 수출품으로 기록한 것은 우리나라 양봉이 계속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꿀의 용도가 다양화되어 유밀과(油蜜果)를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 이 시대에는 절에서 양봉을 했다(사봉, 寺蜂)는 기록도 있다. 고려왕조가 태평성대를 누릴 즈음에는 꿀의 소비량이 많아졌으나 공급량이 모자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양도 충당하기 어렵게 되자 꿀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1192년(명종 22)에는 궁중 외에는 유밀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렸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나 이보다 100여 년 뒤인 중종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벌꿀의 산지에 관한 기록은 많지만 양봉기술 등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실학파가 등장하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산림경제’에 비로소 양봉기술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근대에 와서는 양봉은 한말 독일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량종벌이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 때부터 비로소 가동식 소광을 넣을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벌통, 소초(巢礎), 원심분리기에 의한 채밀방법 등 근대양봉의 3대 요소가 소개된 것이다.

요즘은 양봉 농가가 많이 늘어나 자리다툼도 벌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한 곳에서 머무는 고정양봉보다는 여러 곳을 옮기면서 하는 이동양봉이 어렵지만 꿀 생산량이 더 많아 각광받는다.

5월 아카시아 채밀을 할 때 두 번 이상 이동은 필수적이며 아카시아 꽃의 북상 속도에 맞춰서 이동하면서 채취한다.

이동 양봉업자들에게 삶은 꽃이 피는 곳을 따라다니는 모험이다.

한 곳에 머물러 고정적으로 양봉을 하지 않고 꽃을 따라서 다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영천은 교통망이 발달해 이동양봉을 하는 양봉농가의 채밀지로 유명하다.

특히 해가 많이 드는 남쪽 지역으로 유난히 아카시아 꽃이 많다.

영천을 아카시아 양봉의 메카로 발전시키고 밀원단지 조성해 관광자원 개발하면 지역 발전에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매일신문] 영천/ 윤석중기자
yun-sj22@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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