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137] 과거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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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37]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20.06.0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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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현실의 세상이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걸었던 첫 번째 길은 허망이자 무용이다. 현충원의 ‘과거 친일행위자’ 안장은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그 허망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지난달 24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장한 ‘친일파 파묘’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부각 되고 있다.

이 당선자는 이날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가 개최한 '2020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 자리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파묘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며 관련 법률안을 제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계기로 이 의원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현충원에 묻힌 일부 인사들의 친일행적을 문제 삼고 있고, 보수야당에서는 이들의 6·25전쟁의 공로를 들먹이며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친일파 파묘’ 문제는 곧바로 올해 100세로 생존해 있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사후(死後) 국립묘지 안장 문제로 불거졌다.

백선엽이라는 한 인물이 동전의 양면처럼 ‘친일파’와 ‘호국영웅’의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6·25 전쟁영웅이자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군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호국영웅이자, 외적에 빌붙어 독립군을 학살한 민족반역자라는 함께 할 수 없는 상충 된 삶의 이력이 그를 역사의 법정으로 끌어냈다.

그는 광복 직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6·25전쟁 당시 육군 1사단장으로 최대의 격전지인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인물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그가 이끈 육군 1사단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지리산 빨치산 소탕 작전에도 주역으로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군인 경력 이외 주 중국, 주 프랑스 대사와 제19대 교통부 장관의 이력도 있다. 여기까지는 그가 현충원에 묻힐 정당성이다.

그가 현충원에 묻혀 서는 안되는 이유는 이러한 경력 이전의 활동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며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다. 이러한 전력으로 그는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됐다.

그가 6·25전쟁의 영웅이 된 시발점 역시 그가 해방과 함께 일본군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은 데서 비롯된다.

그가 만주군 소위로 몸담았던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조선인은 조선인이 잡는다'는 명목 아래 창설한 부대로 당시 만주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조선인이라는 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제에 대한 더 큰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 보다 더 충실히 독립군을 학살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역사학자 필립 조웰은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고 했다.

그는 일본어판 자서전에서 “조금 후회스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만주군 간도특설대 시절 본인의 친일행적을 고백했다. 어쩌면 조선이 독립되지 못하고 영영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면 그는 일제의 전쟁영웅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에서 백씨의 삶에 빗대어 가정을 하나를 상정해 볼 필요가 있겠다. 생각조차 불순하지만, 이를테면 대한민국이 또다시 일제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는 가정이다.

그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빌붙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앞장설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이 첫 번째 길을 선택하리라고 믿고 싶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길은 자칫 패가망신의 길이고, 두 번째 길은 되찾은 나라의 주역이 되어 훈장을 받을 만큼 승승장구하는 길이라면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길은 정반대였지만 나중에 현충원에 나란히 묻힌다면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충원에는 후자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갔던 그런 인물들이 호국영령의 이름으로 잠들어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지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 가운데 11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고 한다. 

현실의 세상이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걸었던 첫 번째 길은 허망이자 무용이다. 현충원의 ‘과거 친일행위자’ 안장은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그 허망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의 비석에 민족반역의 행위와 독립된 나라에서의 공을 함께 기록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3131@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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