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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미군기지 내 용산위수감옥 보존·활용방안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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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미군기지 내 용산위수감옥 보존·활용방안 모색
  • 박창복기자
  • 승인 2020.06.29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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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위수감옥 역사성 규명 학술대회 성료

용산구(구청장 성장현) 용산문화원이 27일 문화원 3층 대강당에서 ‘용산위수감옥(이하 위수감옥) 역사성·장소성 규명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근대 역사문화유산으로서 위수감옥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고 이를 효과적으로 보존, 활용하기 위해서다.

용산위수감옥은 군형법을 어긴 일본군인, 군속들을 가두기 위해 일제강점기 서울 용산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20사단이 기지 내 건설했던 군 시설이다. 1909년 준공 후 11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용산 미군기지에 건물 일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용산구 위수감옥 전경 [김천수 제공]
용산구 위수감옥 전경 [김천수 제공]

이날 행사는 내빈소개, 인사말, 주제발표, 패널토론 순으로 4시간 동안 이뤄졌으며 박삼규 용산문화원장(주최), 차상석 한일사료 부회장(후원),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좌장) 등 20명이 자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석 인원을 최소화시켰으며 발열 체크, 거리유지 등 방역 지침도 준수했다.
 
주제 발표는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 김광만 더 채널 PD, 남용협 지음건축도시연구소 연구원, 최혜영 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발표 순)가 맡았다.
 
먼저 김천수 실장은 ‘일제강점기 위수감옥의 역사’를 개괄했다. 김 실장은 “위수감옥은 일제강점기 군감옥으로 사용됐고 해방 이후에도 미군이 용산기지에 주둔하면서 미7사단 구금소로 사용했다. 역사적 연속성이란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대상”이라고 밝힌 뒤 일제의 용산병영, 위수감옥 건설 과정에 대해 논했다.
 
또 각종 문건, 신문기사를 통해 1911년 위수감옥에 수감됐던 의병장 강기동(1884-1911) 선생을 재조명했다. 강기동 선생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돼 경기도 양주군 고안 헌병분견소에서 근무했으며 일제의 의병 탄압 실상을 접한 뒤 의병으로 전향, 경기도 포천·양주 등지에서 크게 활동했다.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을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강기동 선생은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 4월 17일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김 실장은 “강기동 선생 외에도 대한제국 소속 군인이었던 자들이 헌병보조원이나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위수감옥에 구금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추가적인 사료 발굴,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광만 PD가 윤봉길 의사(1908∼1932) 구금지로 알려진 ‘일본 오사카 위수감옥’에 대해 발표했다. 오사카 위수감옥은 과거 일본군 제4사단이 만들었던 군 감옥이다.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았던 오사카성 내에 위치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윤 의사는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18일 오사카 위수감옥에 보내졌으며 12월 18일 가나자와 일본군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재이송, 다음 날 인근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
 
김 PD는 몇 해 전 일본 오사카 시청자료실과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1928년 오사카 위수감옥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1931년 작성된 실측도를 찾아 일반에 공개한 바 있다.
 
김 PD는 “일본에도 없는 일본군 위수감옥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용산에 남아있다”며 “이를 잘 보존하고 복원, 활용하는 방안을 열심히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매일신문] 서울/ 박창복기자
parkch@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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