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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40] 코로나19 ‘통계수치’가 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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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40] 코로나19 ‘통계수치’가 주는 의미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20.07.01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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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한 명 한 명의 죽음과 달리 통계화된 집단의 수치는 완벽한 타인이다. 통계가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숫자가 갖은 의미를 개별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6·25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군인 및 민간인 사망자 52만2604명, 행방불명 43만5468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 및 민간인 사망자 70만 여명, 행방불명 80만 여명, 동족상잔이 낳은 비극의 통계 수치다. 개별적 사연이 없는 통계수치는 단호하고 건조하다. 숫자에는 어떤 명복이나 조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1300년대 페스트라고 불리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000만 명이 사망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코로나19 사망자의 100배인 5000만 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비극’이라는 짧은 명사로 대신한다.

죽음이나 주검의 수는 통계 수치에 반영될 뿐 죽은 자의 사연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최소한 ‘그가 죽었다’는 기억조차 남기지 못한 채 아라비아 숫자로 남겨진다.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억 속의 현실일 뿐이지 현실 속의 기억은 못 된다.

객관화된 죽음의 숫자는 한 명이나 천 명이나, 또는 천만 명이나 다르지 않다. 죽음이 주관화되지 않으면 죽음은 실체보다는 어떤 관념일 뿐이다. 그래서 통계화된 죽음의 수치는 슬픔이나 통곡을 기억하지 못한다.

소련의 스탈린이 독재자다운 명언을 남겼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그에게 자신을 제외한 타인의 죽음은 통계였을 뿐이다. 스탈린이 말한 통계가 21세기 오늘의 지구촌에서 날마다 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사망자 숫자가 이를 반증한다.

지난달 29일 현재 전 세계에서 50만1281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 미국 12만5803명, 브라질 5만7622명, 중국 4641명, 그리고 한국 282명.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멀리서 접하고, 가까이에서 접하고, 그리고 뉴스로 죽음을 접한다. 늘어나는 수치는 경고의 수위를 높이기는 하겠지만 가까이 오지는 못한다. 한 명 한 명의 죽음과 달리 통계화된 집단의 수치는 완벽한 타인이다.

통계가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하나의 숫자가 갖는 의미를 개별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다면 전 세계 코로나19 전체 사망자 50만1281명도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슬퍼할 때 통계수치에 조의가 내재 될 수 있다. 죽음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 실재하는 현실임을 인정할 때 코로나19는 생명에 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다. 코로나19의 재앙은 통계수치에 있지 않다. 경제에 빨간불이 켜지고, 경기침체로 인해 당장 목구멍에 거미줄이 내려앉고 있는 힘든 삶을 견뎌내야 하는 목숨은 통계로 대변할 수 없다. 재난보조금으로 겨우 버티던 목숨들에게 하루하루는 코로나19 사투나 매일반인 시간이다. 재화는 누군가에게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여탈의 절대적 수단이기도 하다.

흔히들 말하듯이 이제 세상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예방백신이야 나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일상을 누릴 수는 없다. 그중에서도 코로나19는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진다는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관이 필요한 시대다.

코로나19는 정체 없는 적이다. 국경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유령처럼 언제 어디에서 불쑥 나타나 우리의 삶을 파괴할지 알 수 없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사는 세상이다. 나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은 코로나19 이전에 끝났다. 더 쉽게 말하자. 네가 코로나19에 걸리면 나도 걸리는 세상이다. 가까운 이웃일수록 더욱 그렇다.

코로나19가 좀체 진정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바이러스의 그 은밀함으로 지역사회 확산까지 우려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종교시설 등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확진자가 발생하고, 전파됐지만 이제는 경로를 알 수 없는 확진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럴 때 일수록 그대가 편안하기를 비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통계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이웃이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3131@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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