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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잊혀진 독립투사 문윤국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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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잊혀진 독립투사 문윤국 선생을 기리며
  • 정원근 인천취재국장
  • 승인 2020.08.1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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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근 인천취재국장

올해도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국내·외 각계인사들이 기념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우리 주변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크게 헌신했으면서도 잊혀진 독립지사들을 찾아내 재조명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그동안 정부나 국민 모두 이를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독립운동을 했으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 중에 대표적으로 ‘금산 문윤국’(文潤國. 1877~1958) 선생이 있다.

문 선생은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동참하고도 남을 만큼 지대한 공적이 있으나 국민 중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문윤국 선생은 1877년 1월30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문정흘의 3남으로 태어나 1909년부터 191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에서 한문교사 및 정주읍 신안소학교 교사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 1913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37세의 나이로 입학 만학의 의지를 불살랐다. 특히 영어와 한학에 능통했다.

선생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과 덕성, 신안면 연봉 등 3개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1919년 2월(음력 1월) 선천군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에 참가 조선독립 13도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날인했다. 선생은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는 독립청원서에 전국 13개도 대표로 서명 제출함으로써 평안북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 후일 유관순 열사를 중심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동참하길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물러나자 기독교계의 대표 이승훈 장로가 선생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로써 거사 실패 후의 후사를 당부하자 선생이 목사로 담임하고 있었던 덕흥교회 이명룡.김병조 두 장로가 대신 서명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3.1 운동 당시 평안북도 선천 정주 및 오산 지역에서 일어난 4000여 군중의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검거돼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선생은 이승훈 장로와 협력해 세운 오산학교를 중심학고 만세운동을 앞장서 결행하다 일경의 창검에 3곳이나 찔리셨으나 죽기를 굴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4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독립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선군수를 통해 세 차례나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해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러던 중에 1958년 1월2일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노루목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별세함으로써 여생을 고향 정주가 아닌 정선 산골에서 마쳤다.

선생은 이승만, 최남선 등과 친분이 있었고 이승훈이 오산(五山)학교를 설립할 때에 배후에서 함께 했고 1990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를 위해 살다 간 문윤국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돼 빛나고 있는데도 노후를 보낸 강원 정선 거처 현장에는 변변한 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전국매일신문] 정원근 인천취재국장
wk-ok@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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