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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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왕조실록에서 율곡 이이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0.09.1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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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명종이 34세의 나이에 죽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이 13세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선조이다. 서자도 아닌 서손이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이다. 선조가 어린 관계로 대비인 인순황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친정을 하게 됐다.

선조 시대에는 초기부터 사림(士林)이 크게 세를 이루어 조정에 등장했다.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이이 등이 그들로서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여러 가지 상소를 하는 등 조정을 좌우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백성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실로 쓸데 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높은 정신세계도 좋지만, 백성은 굶어 죽고 국력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기 일원론이니 사단 칠정론이니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이...곧 조선 백성 태반이 죽어 나가는 변란이 일어나게 되는 걸 예상치 못하고...이런 마당에, 급기야 조선 정치가 붕당 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다.

선조 7년 인사권을 가진 요직 중 요직인 ‘이조 정랑’ 자리가 비었는데, 젊은 사류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됐으나, 심의겸이 이를 반대했다. 김효원은 결국은 이조정랑이 됐는데, 공교롭게도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됐고, 김효원은 보란 듯이 이를 반대했다. 이 일을 두고, 김효원을 지지 하는 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적대적 방향으로 대립하게 됐는데, 김효원이 동쪽인 건천방에 위치했다고 하여 동인이라 하고, 김의겸이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이라 칭했다.

사림은 사화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게 됐고, 이러한 붕당은 이후의 조선 정치의 기준이자 큰 장애가 되고 만다. 이러한 시기 조선에 그나마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등장하니, 이 사람이 바로 율곡 이이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혔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효자인 이이는 어머니이자 스승인 사임당 신씨가 죽자 인생에 회의를 느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했고, 하산 해 성리학에 전념하여 20대에 이미 학문적으로 큰 성취를 이뤘다.

이어서 이이는 명종 19년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뒤, 선조 1년에 이르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이의 학문적 명성과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실상 이이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즉 당시 사림은 서경덕, 이황, 조식 등 자신들의 스승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그들 대로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이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독학파인데다 서경덕, 이황, 조식을 비판하기까지 하였기에 사림과 신료들 간에 이른바 왕따를 당하기도 한 모양이다.

이이는 동서분당의 시대에 사실상 홀로 중립을 지키며 동서 간의 화평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동서의 강경파 이발과 정철을 불러 중재를 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얼마간의 평화가 유지됐으나,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간의 적대감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한편, 임금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고 믿고 의지할 정치 세력도 없이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선조,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림들이 조정에 가득 찬 가운데 자칫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기지를 발휘해 두 형을 제치고 옥좌를 차지한 인물답게, 붕당 상황을 방관, 조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왕권을 확립해 나가는 재주를 보였다.

선조는 어느 편에도 있지 않은 이이를 이용해 세가 높아지는 동인을 견제하고자 마음먹고, 이이를 중용해 국가의 주요 대사를 맡겼는데, 그 능력이나 마음가짐에 선조도 반했는지 이이가 사직상소를 올리고 물러나 앉았을 때에는 엄청난 애정과 신뢰를 담은 비답을 내리기도 했으니, 이이가 인물은 인물이었나 보다.

이이는 조정의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아 국가 구조개혁, 공물. 군제, 민생 등의 개혁적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그럴듯한 성과도 나오기 전인 고작 1년 남짓 만에 이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탄핵과 선조의 변심으로 사직을 당하고, 곧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고작 49세였다.

이이는 17년을 재조와 재야에서 한결 같이 경장과 동서간 화해를 외쳤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동인 서인 두 붕당은 새로운 차원의 격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니, 이게 탁상공론의 달인들인 선비들 집단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나 보다. 이래저래 조선은 비극의 나락으로 가고 있었다. 천재는 왜 끝이 별로일까? 본인은 정직하게 살다가서 후회가 없을까. 안타깝다.

 

[전국매일신문 전문가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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