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산송씨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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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여산송씨부인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0.10.2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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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유명여류인사'속에 한국에서 유명한 신사임당을 제치고 기록된 여산송씨 부인은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영의정 송일의 딸, 그리고 남편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부인, 그리고 아들 영의정 홍섬(洪暹)의 어머니였다.

역사상 유일무이한 가족의 기록으로 한국여성으로 유일하게 세계유명여류인사명단에 기록됐다. 94세 장수를 누렸으며, 조선왕조 최초로 문과에 두번이나 급제한 남편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을 두었는데, 여자가 당시 94세의 오랜 일생 을 살면서 아버지와 남편그리고 아들 삼종(三從)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으니...

영의정이란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수상(首相), 재상(宰相) 승상(丞相), 영상(領相)으로 불리었던 중앙 최고위 관직 정1품으로 품계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다. 이러한 영의정을 한 사람도 아닌 세 사람과 일생을 살았으니 그 주인공은 연산군과 중종조(中宗朝)에 영의정 송일의 딸이자 영의정 홍언필의 부인겸 영의정 홍섬의 어머니인 여산송씨(礪山宋氏) 부인이다.

아버지 송일(1454~1520)은 좌·우의정을 지내고 60세에 영의정이 되어 67년의 일생을 살았고, 남편 홍언필(1476(성종 7)~1549(명종 4))은 1504년(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갑자기 사화에 연루, 진도에 유배되어 합격이 취소됐다가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어 1507년(중종2) 증광문과에 합격, 두 번째 급제를 하게 되는 기록을 남겼고 대사헌, 우·좌·영의정을 지내고 74세를 살았다.

아들 홍섬(1504~1585)은 대제학, 이조판서, 우·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을 3번이나 역임했고 82세로 임종했다. 당시에 왕비는 송씨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고 깎듯이 존경을 표했다고 하는데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여산송씨 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한다.

송씨부인은 예의범절이 밝고 덕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장부였다고 한국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아마 세계사에서도 이런 기록이 있을까? 이런 강한 의지와 기개를 겸비한 여장부 송씨부인의 품성탓인지 남편 홍언필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승승장구해 영의정까지 달했고, 아들 홍섬도 벼슬생활에 충실하면서 근검, 절약하고 청빈하여 영의정을 지내 청백리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1548년 9월 29일 명종이 영의정 홍언필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87세에 이 광경을 보니 역사에 없었던 경사였다. 여자로 태어나 이보다 더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있었을까? (궤장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에 공로가 있는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에게 왕이 내려주던 안석과 지팡이)

과거시험에 두번 급제한 조선조에 유일한 인물, 그는 여산송씨부인의 남편인 홍언필이다. 한번 급제하기도 어려운 과거시험을 두번이나 급제한 영의정 홍언필. 또 송씨의 삼종(三從)은 모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정경부인 송씨는 중종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덕에 어려서부터 부유하게 자랐으나 거만하지 않고 남편 홍언필에게 시집와서 며느리로서 효도 봉양을 잘하고 남편을 잘 섬겨 해로하고 정경부인이 됐고 1남 1녀 자녀에게 엄정하면서 자애롭고 소신있는 훌륭한 어머니로도 유명했다.

아들이 정승의 반열에 오른지 15년 넘게 살면서 효도보다 임금에 먼저 충성하라 가르쳤고 평생 인품이 흐트러짐이 없어 칭송을 받았고 용모도 단정했다고 한다. 송씨가 94세로 죽고 아들 영의정 홍섬이 3년 시묘살이 까지 마치고 몇 년 지나 81세로 죽었다.

홍섬의 아들 홍기영은 掌握院僉正(장악원첨정)이 되어 우의정 심수경의 사위가 되고, 딸은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에 시집가니, 홍섬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사돈이 되고, 딸은 선조의 형수가 된 셈이었다.

우리 역사에는 부자지간, 형제지간에 영의정을 역임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이처럼 한 여인이 세 영의정과 연관을 맺기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와 같이 다복하고 훌륭한 여인의 이름이 끝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철저한 남존여비의 유교적 유산 때문이다.

하기야 조선 제일의 여류 예술가에, 현모양처이며, 율곡의 어머니이기도한 申師任堂(신사임당 : 중국 성군 중의 성군인 周나라의 文王을 낳은 太任을 본받기 위해 지은 호)조차도 "국사대사전"에는 ‘진사 명화의 딸, 감찰 이원수의 부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나와 있을 뿐, 끝내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다.

21세기 오늘에도 방송에 나오는 젊은 엄마가 자기 이름을 먼저 대지 않고, 누구의 엄마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걸 보면 역사의 폐습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동시에 송씨부인이나 신사임당 같은 이의 이름을 찾아 내주는 일 또한 막중한 역사가들의 임무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전국매일신문 전문가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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