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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건국이념의 인류보편주의 가치 실현-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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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건국이념의 인류보편주의 가치 실현-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①
  •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 승인 2020.12.0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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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대한민국 근세사 100년은 치열한 투쟁의 역사였다.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 속에 치열한 삶과 희생에 의해 오늘을 만들었다. 우리는 세대를 거치며 그 시대의 선조들이 막연히 희망했던 나라를 마침내 이루었다고 자부해도 좋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독립국 가운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암울함으로 이 사회를 물들이고 있다. 독립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이념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차례 무너져버린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면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했던 믿음마저 무너져버린 시간도 있었다. 또한, 배고픔을 이기면 인간다운 삶에 다가갈 수 있다는 선진국의 꿈도 막상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별것이 아니라는 허탈감이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은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화에 불과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이 이 한반도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온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성의 뜻이 권력의 방향을 발전시켜온 오래된 역사가 이 땅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역사에는 이러한 ‘전통적 실용주의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고조선은 한나라를 상대로 백성의 정체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당의 100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200만 명의 인구에 불과했던 고구려가 당시 1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대륙을 상대한 고대 한국인의 승리였다. 발해의 역사가 그렇고 고려의 건국이 그랬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 는 건국이념은 우리 사회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유래된 불교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며 국가의 위민사상으로 자리 잡고 이후 한반도에 유입된 다른 종교들이 유교든 기독교든 공동체 중심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중세 500년의 왕조를 유지한 나라는 동 시대에 유일한 나라이며 이는 위민정치를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혹자는 3%미만의 양반과 50%의 노비로 구성된 비정상적인 귀족국가인 것처럼 묘사하는 이도 있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이래 끝없는 하층민의 반란의 역사가 있었고 고려무신정권 때는 천민출신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비인간적인 다른 문화권인 노예의 삶과 비교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까이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와도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에게 독특한 한국의 정서를 경험하게 한다. 중세시대 어느 곳이든 비슷한 백성의 절대종속 관계와는 다른 일반 백성의 마음이었다. 주군 없이 싸우는 노비를 포함한 일반 백성의 저항에 당시 일본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조선의 백성은 노비조차 스스로 존재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이 통일을 하고 이민족이 대제국을 세우고 한반도를 침략하였지만 그들이 결국 한반도의 자치를 인정하고 완전한 복속을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나라가 그렇고 이후 명멸한 송, 원, 명, 청나라가 그렇다.

조선의 경국대전은 위대한 법전이다. 태종 때 시작하여 중종에 이르는 250년 걸쳐 완성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보완되어진 동 시대 최고의 법전이었다. 국가통지 원리에서 방법, 그리고 여성과 노비에 대한 인권 등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정신의 기본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연장선에 있었던 대한제국은 1897년에 성립되었다. 이후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조선왕조는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04년 8월 강제 체결된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와 1906년 3월부터 통감 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일본의 경제 침탈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를 재편하는 등 식민 지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갔다. 이에 국민 스스로 조직적으로 자각하여 일어난 운동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이다. 이러한 국민의식은 한일합방 이후 국가의 주인이 왕실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의식이 일반화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를 바탕으로 1919년 3ㆍ1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waterwrap@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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