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악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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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악역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02.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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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씨를 흑백논리로 양분화한다면 악인과 성인으로 구분될 것이다. 악이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만약 세상에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인의 업적이 빛을 볼 수 있을까 싶은 역설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면 활극, 사극, 심지어 멜로물에도 악역은 있게 마련이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테마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줄거리에서 악인의 역은 긴장감을 조성하며 재미의 흐름을 조절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간혹 극장에 단체 영화 관람을 가기도 했다. 독립군이 이불만한 태극기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나타나면, 우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어도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 일본인 헌병대장이 총을 맞아 죽을 때도 박수를 쳐댔다.

사회에서는 악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악인의 역은 영화의 묘미를 살리는 조미료 역할을 하는 탓으로, 없어서는 안 될 비중을 차지하는지라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인기리에 방영된 TV연속극 ‘여로’에서도 박주아의 혹독한 시어머니의 악역이 없었다면 그 재미도 많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악역을 맡았던 사람들의 실제 마음은 선한 역을 맡았던 사람들만큼이나 선하다고들 했다. 선한 마음을 갖고 악역을 자처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도 있다. 나의 어쭙잖은 글에도 가끔 악역으로 등장해서 난도질을 당하기도 하는데, 바로 아내가 그런 사람이다.

아내의 일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걱정은 살림살이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없는 살림에 생활비를 쪼개어 지내려니, 앞뒤 생각 없는 나와 아이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악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집 경제권은 아내에게 있다. 용돈이 부족한 아이들 눈에 비치는 엄마는 팥쥐의 엄마도 되었고, 때로는 아내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로 보일 적도 다반사였다. 아내가 제약을 많이 하다 보니 아내 모르게 아이들과 모종의 거사를 치르려면, 우리들은 아내의 심기와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남편이라는 위인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하고 앞뒤도 모르고 천방지축이니, 아이들하고 머리만 맞대고 있어도 아내는 의구심 가진 눈초리로 쳐다보고는 한다. 딸과 교감을 통하며 모종의 일을 추진하다가 발각된 적이 있었다. 갚아야 할 영농자금과 대출금이 즐비한데, 그것은 뒤로 미루고 교육적인 차원이라고 핑계를 대며 딸에게 디지털 피아노를 사준다고 약속한 비밀 프로젝트도 아내에게 들켜서 무산됐다.

내일 모레면 나이 쉰이 되는 사람이 애들보다 나을 것 없다는 핀잔만 듣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약속에서 성사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눈에는 아빠는 좋은 아빠였고, 엄마는 점수도 못 받는 낙제생이나 다름없었다. 딸이 트럼펫 배우겠다는 소리에, 지키지 못하는 공약을 내세운 국회의원 후보자처럼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는데, 저희 엄마가 말리는 일하나 더 만들어 놓은 꼴이 되었다. 그뿐인가 의리와 우정을 내세우는 친구의 연대보증을 섰다가 그 후로 친구가 갚지 않아서 분기별로 갚는 이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자 독촉장을 손에 쥔 아내가 그때 팔 걷어 부치고 말렸어야 했는데, 악역소리 한 번 덜 들으려다가 푸념을 하기도 했다. 그 후로 나는 인감도장과 통장을 아내에게 빼앗기며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 집안에서 금치산 판정을 받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영화 속의 악역은 연기적인 기본 바탕이 정말로 충분히 있어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소리 지르고, 욕한다고 악역이 되는 게 아니다. 악역이야말로 희로애락을 다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어쩔 때는 깔깔 웃다가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부인에게는 저렇게, 변화된 모습을 다양하게 잘 표현해야한다.

영화에서 악역이 없었으면 재미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듯이, 우리 집에서 악역이 없었으면 이 알량한 살림이 거덜 안 나고 버티고 있었을까? 정말 우리 집 아내의 악역은 정의로운 악역,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긍정의 열연 악역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고마운 각광받는 악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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