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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흙수저의 성공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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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의 시선] 나는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흙수저의 성공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 승인 2021.03.10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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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사회갈등구조의 타파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가까이에 흔한 개천을 끼고 살아왔다. 평범한 내 주변에서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로 개천은 가까이에 있는 내 주변의 어려운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개천의 의미가 다시 흙수저의 성공신화가 중첩된 의미로 전달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흙수저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였던 것 같다. 해방이후에 태어나 6·25를 거치며 피폐했던 시기에 성장한 세대가 사회 중심에 등장한 시기와 시대를 같이 한다.

계층과 계급이란 용어는 그 의미가 혼용되어 사용되어진다.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전쟁노예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약탈경제에 의존했던 유목민족과는 달리 신분의 이동이 급속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의 왕조의 변화 같은 급속한 변화를 제외하면 이러한 신분제를 뒤집을 만한 역사적인 요인은 별로 없었던 편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천민의 인구비율이 50%를 이룬 적도 있었으니 하층민의 나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은 이러한 국민적 배경이 존재한다. 우리의 근세사는 우리역사에서 가장 신분이동이 활발한 시대를 만들었다. 이는 신분상승의 욕구가 강열하게 불붙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제와 해방, 그리고 6·25 전쟁은 전통적 신분이나 지배계층을 완전히 허물었고 경제적 지위로 평가되는 현대사회의 상류층이 새롭게 구성되는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그러한 계층구조가 세습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는 특히나 부의 세습을 견제하는 국민이 많아졌고 제도적으로도 이를 제지하려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다. 아마도 이는 부의 세습이 인정될 수 있으나 정도와 정당함의 문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에는 유연한 자세와 유연한 사회적 합의가 좀 더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처럼 부와 정치적 권력이 집단화하여 세습되는 경우는 단호하게 차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대별 계층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나라는 노인인구의 빈곤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년실업의 증가와 사회적 계층불균형이 심화되고 출산율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청년세대에 소득기반을 만드는 것은 그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에는 대견함이란 따뜻한 감정이 숨어있다. 그러나 흙수저란 용어의 세대의 공감대는 시대의 특성을 대변하고 있으며 한국의 성공신화의 주역임을 내세우는 잠재적 의식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월남파병, 파독광부와 간호사, 중동파견 근로자 등에 그들의 젊음을 희생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세대에게 흙수저란 용어는 모두에게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땅만 보며 열심히 살아왔던 치열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신화 뒤에는 또 다른 선배 세대의 희생이 있었다. 이후 60년대 세대는 민주화를 완성하며 새로운 국가도약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한국의 성공신화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흙수저의 성공신화는 이러한 세대독점의식이 내포되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땅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고 인생을 투쟁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할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아집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1990년 후반의 IMF의 사태는 우리나라의 중산계층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기점이 되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세대갈등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80년대는 민주화의 열기로 뜨거운 시기였음에도 반공으로 이념화된 기성세대와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세대갈등이라고 말할 만큼의 세대분열은 없었다. IMF이후 사회 중심을 이룬 특정 세대에게 편중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세대 간 빈부격차를 만들게 된 것이 세대갈등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 및 사회의 기득권 역시 이러한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60년대에 태어난 민주화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정치인으로 등용되는 경우가 드물게 되었다. 지역자생단체는 청년회의 연령이 50대 심지어는 60대가 되어서도 청년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40대가 아직도 중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2·30대의 청년들은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 세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빼앗겨온 것이다. 이것은 45년 광복 이후에 태어나 성장기를 거친 세대의 책임이 크다.

2·30대의 청년들은 애들이 아니다. 기성세대 본인들의 2·30대를 돌이켜 보면 일찍 정치에 뛰어들고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였던 원동력은 선배세대가 키워주고 후원하여 주었고 자리를 비워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이 사회의 중심에 서 있는 민주화 세대의 60년대 출신들도 이를 명심해야 한다. 학생운동은 사회활동으로 진출하는 하나의 등용문이 되었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몫이다.

이제 흙수저의 성공시대를 자랑하는 시절은 지나갔다. 이는 더 이상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존재한다. 그 시절에는 급변하는 변동의 시기에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고 그것은 노력을 보상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회가 쉽게 오는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음의 삶도 아니다. 인생은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흙수저의 성공과 같은 의미가 단지 열심히만 살았다는 자기자랑의 앞치레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후배세대에게 느껴지고 있다면 기득권 세대는 이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성공한 대한민국은 지나간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현장에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현재의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고대에 함무라비법전에는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심지어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청년들은 사치를 좋아하고 버릇이 나쁘고 권위를 비난하고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기성세대가 후배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결같은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세대갈등이 있다면 이는 기성세대에게 원인이 있다. 세대균형은 그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젊음은 도전을 선호하고 기성세대는 신중함을 갖고 있다. 사회균형은 이러한 절묘한 조합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발전해야 한다. 흙수저의 성공신화는 그 대가를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이 은연중에 함축되고 있어 더 이상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도 바람직할 수 없다. 세대갈등 해소는 젊은 세대를 먼저 이해하고 그들에게 먼저 기회가 제공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양동익 제주취재본부장
waterwrap@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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