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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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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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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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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가정통신란’이라는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부모의 나이 학력, 직업을 기재하는 난이 있다. 직업이라?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장래 희망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 장래희망 중에는 과학자, 법관, 발명가, 선생님 등 다수의 직업이 망라되었다. 그때 내 차례가 되어 농사꾼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교실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바늘하나 꽂을 땅하나 없는 녀석이 농사꾼이라고 했으니 내가 생각해 봐도 웃을 일이다. 배고팠던 시절 내가 바라본 직업은 농사꾼 그 이상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장래희망대로 농사를 짓고 있으니 목표가 달성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성공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취직을 하려고 최종학력을 기재한 내 이력서는 오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력서의 잉크 글씨들이 눈에 고이는 눈물로 프리즘 되어서 가냘픈 무지개 색으로 비치는 것을 보고서 두 번 다시 이력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빈곤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이력서 들고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입사한 공장은 직원이 달랑 나 하나였다. 공장 특성상 오전 다섯 시에 작업이 시작되어 밤 아홉 시를 넘기기가 일쑤여서 몇 달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니 배고픈 놈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렸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생각 끝에 해외근로자로 취업하고자 시험을 치르는데 볼펜은 필요 없고, 강변도로 현장에서 모래 가마니 둘러메고 죽기 살기로 뛰는 기상천외한 시험도 치러봤다. 결혼을 하고 취업한 가구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는 일을 했다. 임금은 한 달에 두 번 영화 구경시켜주는 것이 전부라 했다. 근로기준법, 복지근로수준은 한마디로 선진국에나 있는 얘기였다. 노동청인지 노동부인지의 해당 부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뛰쳐나와 아내와 함께 뱃가죽이 등가죽에 맞닿는 경험도 해보았다.

아는 이의 소개로 작은 공장에 취업해서 야간작업을 할 때였다. 다른 공원들이 거의 다 퇴근을 하고 한두 명 남는 일꾼들 틈바구니에서 온몸을 물어뜯는 추위에 몸부림도 쳐봤다. 한두 푼 더 얹히는 급료보다도 배때기에 기름기 가시려면 아직 멀었다는 고용주의 말 한마디가 무서워서 악조건에도 말 한마디 못했다. 한 달에 한번 받는 월급봉투는 노력의 대가라는 의미를 무색케 할 만큼 얄팍하여 그 공장을 그만두는 계기가 됐다.

배우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그 많은 직장하나 구하지 못하고 남의 땅 임대농사도 지어보기도 하며 인력시장, 노동판, 연탄장사를 거치는 동안 인간적인 기본품위는 마모되었다. 비 오는 날이나 여름밤에는 미꾸라지를 잡기를 위해 통발을 챙겨들고 벌판에서 이슬에 젖으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짧은 여름밤이 길게만 느껴지는 벌판 한가운데서 고독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겨울날엔 가장 원초적인 소망인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연탄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의 무게로 느껴졌다. 한 줌의 일용할 양식을 얻기까지는 어깨 죽지 밑에 고통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가장의 체면으로 덮어 버렸다. 이제는 머리도 기본적인 생활만을 영위할 수 있는 상태로 퇴화되어 가는 듯 했고, 육신은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가는 현실이 서글퍼질 뿐이었다.

한 점의 먹이를 얻기 위해서 밀림, 사바나, 사막을 뛰어 다니는 짐승처럼, 지난 한해에도 뚜렷한 직업 없이 목숨을 연명 할 수 있는 한줌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농사일, 품팔이, 공사장인부, 미꾸라지잡이, 연탄배달을 전전하며 사계절을 보냈다. 어떤 기후조건에도 일을 했으니 딸의 가정통신란의 직업란에 ‘전천후’라 기재하면 될 듯싶기도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장난치지 말고 농업이라고 기재하잔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 아니었던가? 딸아이가 시큰둥하더니 세련된 서양이름으로 나레이터, 르포라이터, 코디네이터 같은 직업 기재할 것 없냐고 하는 소리에 “엄마, 그러면 ‘테미네이터’라고 써라”하며 응수했다. 너야말로 배부른 소리하지 말고 한 가지 직업이라도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려라.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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