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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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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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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0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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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돼지 삼 형제가 집을 지었다. 어느 날 늑대가 돼지를 잡으러 왔다. 짚으로 지은 돼지의 집을 늑대가 콧김으로 부니 그만 집이 날아가 버렸다. 그 집에 살던 돼지가 다리야 날 살려라 하면서, 나무로 집을 지은 또 한 마리의 돼지 집으로 도망을 갔다. 나무로 만든 돼지의 집까지 쫓아온 늑대가 이번에도 집을 부숴놓았다. 두 마리의 돼지가 길지도 않은 짧은 꼬리가 빠지도록, 벽돌로 지은 돼지의 집으로 도망을 가서 결국은 살았다는 얘기를 동화책에서 본 기억이 요즘 되살아났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영락없이 짚으로 지은 돼지 집 짝이 난 것이다. 우리 동네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몇 해 전부터 말이 돌더니, 근래에 들어서 거의 확정되어가는 것 같았다. 구체적인 땅값과 보상 문제까지 거론되더니 보상금을 수령했다는 말이 내 귀에까지 들렸다. 나같이 남의 땅에 얹혀사는 사람들은 약간의 이주비용으로 해결을 본다는 말이 돌고 있다. 그야말로 짚으로 지은 돼지의 집 짝이 난 것이다. 어쩜! 세상 살아가며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바둑의 무급이 ‘반상(盤上)’에 내 집하나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어떤 기업총수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한 말이 있다. 내가 반상 앞에서 바둑돌을 잡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저 넓은 바닥에 내 집 한 칸 못 짓겠나 싶었다. 처음 두는 바둑이며 실력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지라 부득탐승(不得貪勝)않고 집 바둑을 둘 작정을 하고 앉았다. 흑을 잡은 상태라 선점으로 가운데 어복(魚腹)을 피해 귀를 찾아서 선점을 쳤다. 바둑판에서의 나의 집을 짓기 위한 첫 삽질이 시작된 것이다. 상대방의 기풍(棋風)을 모르는지라 섣불리 착점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 하다가는 풋바둑의 실력이 들통 날 판이라 장고에 돌입했다. 장고도 잠시, 상대방의 속력행마(速力行馬)에 속절없이 속수(俗手)로 말려들었다.

상대방은 공격바둑으로 나의 집 바둑을 위협하며 치고 들어와 다수의 내 세력이 곤마(困馬)에 처해졌다. 궁하면 손을 빼야 한다는 철학을 잊고 버팀수라고 둔 것이 그만 축(逐)으로 몰렸다. 연단수(連單手)라고 봐야겠는데, 중마(中馬)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 성동격서(聲東擊西)랍시고 엉뚱한 곳에 패를 걸고 보니, 상대방이 불청으로 받아 쳐버려 오히려 악수(惡手)만 둔 꼴이 났다.

순간 고수일수록 단수는 못 본다는 말이 생각나서 반상에서 묘수 둘 곳을 찾아보았다. 묘수 세 번이면 지는 바둑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가 묘수라고 묘착한 것이 그만 손해수가 될 줄은 몰랐다. 급기야 반상은 백의 돌로 가득 채워지고 조급한 마음이 생기는데, 반상에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눈목(目)자까지는 바라지 않고, 날일(日)자 형태의 집 한 칸 짓기에도 진땀이 났다. 반상에 집 한 칸 남기기 위하여 암수(暗手)라고 한 수 둔 것이 묘착이 되어 반상의 우(右)하(下)에 위치한 몇 점에 요행히 절처봉생(絶處逢生)의 빛이 보였다.

그러나 상대 국수가 나모다 윗수라 그것을 어이 눈치 못 채겠는가. 꽃 사궁이라는 것이 들통 나서 집 중앙을 치중당해 사석(死石)이 되었다. 이제는 이 반상에서 집 한 칸 나기가 조남철이 와도 안 되게 생겼다. 완전히 몰판을 당했다. 반상(盤上)에서나 세상(世上)에서나 집 한 칸 장만하기가 결코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언젠가 지인의 집들이에 갔었다. 은행 융자를 얻고 하여 조금 무리하면서 그렇게도 염원하던 내 집을 장만하였다며 너무나도 좋아했었다. 그 후 어이된 영문인지 일 년여 만에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고 급기야 월세로 옮기더니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그야말로 바둑판에서 오궁도화(五宮桃花)가 치중당해 꽃 사궁으로 줄었다가 또 다시 치중당해 단수로까지 몰린 짝이 난 것이다.

이제 이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돼지 형제 중 한 마리의 짚으로 지은 듯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억울하게 져야 바둑 는다. 어디 가서라도 절대 호구(虎口)에 돌을 넣는 어리석은 우(偶)를 범하지 말라”고. 앞으로 내 새끼들하고 살 집 한 칸을 반상이 아닌 세상에 짓기 위하여 반드시 토혈지국(吐血之局)하리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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