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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마리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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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마리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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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5.1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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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다방커피를 외상 해 먹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커피인데,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노래 가사처럼 집에 가서 타먹든가 자판기 종이컵 한 잔이면 해결되는 것을 그 짓을 하느냐고 말했던 적이 있다. 모내기도 거의 끝나 갈 때라 마음이 약간 풀어졌다. 농기구 수리점에 이앙기 부속 하나를 가지러 갔다. 수리기사가 기다렸던 사람이 온 것처럼 반색을 하더니 부속과 연장 갖다 주고 올 동안 가게를 잠깐만 지켜 달라며 나의 답을 듣지도 않고 차를 몰고 달아났다.

잠시 후 차 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다방 여인이 보자기에 싼 쟁반을 들고 들어 왔다.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주머니에 돈도 없어 난처했는데, 다짜고짜 보자기 풀고 커피를 탔다. 남자는 뒷간에 갈 때도 주머니에 돈을 넣고 가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는데 낭패다. 어렵게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돈이 없음을 알리자 외상도 된다며 자기 것 먼저 후루룩 마시는데 안 마실 수도 없어 본의 아니기는 하지만 나도 다방 커피를 외상으로 먹은 것이다.

기사는 오지 않고 다방 여자는 후딱 자리를 뜨기 미안해서인지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하면서도 외상 수첩에 내 이름을 적었다. 아가씨라 부르기는 그렇고 아줌마라 호칭을 써도 나무라지 않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얘기를 해도 로맨틱한 얘기가 아닌 삶의 무게가 실린 얘기였다. 여자가 이 장사 저 장사 끝에 물장사까지 왔는데, 서너 집 걸러 소주집, 호프집, 커피점 거의가 물장사들이니 이 짓도 못해 먹겠다고 했다. 물장사 전면에 세우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장사라는 얘기까지 할 동안 기사는 오지 않고 있었다.

이 아줌마는 커피 잔을 챙겨 달아났다. 그나저나 저 아줌마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아줌마가 의문의 변사를 당한다면 치정 또는 원한 등으로 수사하던 경찰이 수첩에 적힌 이름대로 복덕방 영감, 그 안에 재철이, 카센터 사장, 조카, 이 사람, 저 사람 등등 경찰서로 호출될 것 같았다. 그러니 얼른 외상값부터 갚아 이름부터 지워야겠다.

친구가 직장을 다니느라 휴일 날 모를 내 달라 해서 하루 동안의 여유 시간에 내 논에 뜬 모를 심는데 빨간 경차가 서더니 오빠를 부르며 아가씨가 내렸다. 오빠라니? 주위에는 나밖에 없는데, 커피 한잔 마시면서 허리 좀 펴 보란다. 아가씨는 콧노래 비슷하게 시작도 끝도 없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만 되뇌는데, 내 나름대로 그 뜻을 헤아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 포기도 벌지 않은 논에 물만 출렁이고 논두렁이 훤히 올려다 보였다. 수리시설 잘된 것도 이럴 때는 원수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주위를 또 둘러보니 아까는 보이지도 않던 건너편의 논두렁에 콩 심는 아낙의 눈이 보였고 수로 건너 쪽에선 나처럼 뜬 모 꽂는 영감님의 눈이 있고, 우리병원 흡연실에서 할 일 없이 내려다보이는 눈이 있을 것이고 풍년마을 베란다에 들러붙은 눈이 몇 개 있을 것이며 둑 밑 밭에도 눈, 저기도 눈, 찾아보니까는 보이지도 않았던 눈, 눈, 눈, 온 벌판에 눈(目)이 허옇다. 이곳은 5월의 화이트 데이다.

마지막 모내는 날 제대로 잡았다. 휴일인데다 맑고 바람 한 줄 없다. 보행이앙기로 모를 내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 새 모 끝이 말린다. 반복되는 작업이라 지루하다 못해 졸음이 피어올랐다. 약간의 운무가 낀 산에서 가끔 뻐꾸기 소리가 들렸고, 논바닥 흙속에 갇혔던 공기가 이앙기 바퀴에 밀리면서 뽀그르르 방울을 만들며 새어나오기도 하는 것이, 뻐꾸기 소리만 안 들렸으면 시간이 정지된 느낌마저 들었다.

정지된 시간을 깨듯 감정동 우저서원(牛渚書院) 앞 농로로 작은 스쿠터 한 대가 폴폴거리며 오고 있었다. 모내는 것을 한참이나 보고 섰던 아가씨가 시골의 아빠가 생각났다며 더운데 시원하게 드시라며 다방 로고가 새겨진 물 한 병을 주고 같다. 그 물을 들이켜고는 예수의 신발 끈조차 매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미천한 내가 예수의 흉내를 내어 보았다. “사마리아 여인이여, 그대는 복 받을 것이고 천국이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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