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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식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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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식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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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5.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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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성당에 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동네 형님이 직불제 확인 서명을 받으러 오겠단다. 벌써 몇 사람 째인지 줄 모르겠다. 성당 미사 시간에 늦을 것 같고 한번 앉았다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점심때 집으로 찾아갈 터이니 점심상이나 차려 놓으라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점심 식기 전에 빨리 오란다. 밥 수저를 드는데, 형님이 성당 갔다 온 사람이 식사기도 좀 하라며 빙긋이 웃는다. 성당도 안 다니는 사람이 식사기도를 종용하는 것이며, 빙그레 웃으면서 기도를 채근하는 것이 장난기와 짓궂음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새삼스러이 무슨 식사기도냐며 그냥 식사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아마도 미사가 다른 날보다 좀 늦은데다 그날따라 재속 프란치스코 구역모임을 하느라고 좀 늦은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 같았다. 식사기도를 자꾸 종용하는 통에 주방에 있던 형수님과 손님들까지 밥상에 앉히고 식사기도를 시작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 이 세상에는 먹을 것이 있어도 입맛이 없어 못 먹는 사람들이 있고, 입맛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먹을 것과 입맛을 함께 내려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음식을 장만하신 주님의 여종에게도 은총 내려 주시옵소서.

아울러 이 음식의 재료들을 이곳까지 오게 힘써 주신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도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채소와 곡식을 키워낸 농부들의 수고도, 싱싱한 회를 먹게끔 거친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고기를 낚아 올린 어부들의 안전도 지켜 주옵소서. 저와 마주 앉은 형님께서 워낙 술을 좋아하시는데 사악한 술로부터 그의 건강을 지켜 주시옵고, 저에게 강제로 술을 권하는 그의 팔을 내치시어 술잔을 떨어트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경건한 식사기도 시간에 실실 웃는 마주 앉은 형님의 얕은 신앙심을 책망 마옵시고, 굳건한 믿음을 주시어 다음부터는 함께 기도하게 하시며, 경건한 저의 식사기도가 길다고 속으로 불평하는 자들을 용서 마옵시고, 그들의 국그릇을 식히어 기름으로 엉겨 붙게 하고 제 그릇만 따뜻하게 지켜 주소서.”

“야! 듣자듣자 하니까, 너 기도야? 설교야? 악담이야?” “하느님 아버지. 신성한 기도를 모욕하는 앞에 앉은 형님의 무지몽매함을 지극 거룩하게 용서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로 식사기도를 이어 나가려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가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게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이어서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 되시며, 태중의 아들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마리아님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비어주소서. 아멘!

“야 장난쳐!” 소리에 감고 기도하던 눈을 살짝 떠 보니 숟갈을 불끈 쥐고 있는 것이 금방 날아올 기세다. 밥을 먹다가 얹힐 수도 있어서, 가슴을 탁탁 치는데, 아예 기도하면서 가슴을 치고 먹읍시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일타투피가 따로 없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나이다. 내 탓이오!(가슴을 친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가슴을 친다)

자기가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를 드리는데, 기도를 장난친다고 한다. “기도 마치는 의미로 성가 한곡을 부리겠습니다. 성가는 ‘주의 빵을 서로 나누세’로 하겠습니다” 그 점심식사 때 밥 한 그릇 다 먹은 사람은 나 혼자였고, 마주 앉은 형님은 씩씩대며 몇 수저 뜨다 말았고, 형수님은 웃느라 뒤집어져서 그도 저도 못 먹었다. 이후 명절을 맞아 그 형님 댁에서 떡국을 먹게 되었다. 마주 앉은 형님이 “입 쩍도 하지 말고 먹어”라고 한다. 식사 기도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안 할 사람이야. 속으로 했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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