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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중간의 깃발,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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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중간의 깃발,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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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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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한국의 큰 배우 윤여정이 인류 향해 가르침 던졌다. 깃발은 최고(最高)도 최상(最上)도 아닌 중간에서 날리는 것이다. 어중간(於中間·가운데에 있음)한 위치를 대개는 싫어할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자리가 중간 즉 가운데다.

3000여 년 전 동이겨레도 함께 빚은 동아시아 황하(黃河)문명의 결정체 한자, 그 원형인 갑골문의 깃발 그림 상형문자가 ‘가운데’의 뜻 중(中)이다. 치우치지 않음, 중용(中庸)은 내내 동양의 착한 존재 방식이었다.

유물론적 사유(思惟·철학) 강한 서양도 이를 좀 알고는 있었다. 5천 년 전 이집트 상형문자에서도 깃발은 신(神)을 가리키는 신성한 그림글자였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는 빛나는 자리에서, 윤여정은 ‘최중’이라는 한마디를 무심한 듯 던졌다. 지나가는 말이려니 했다. 아니었다. 이어지는 말은 비수(匕首)처럼 상하좌우를 찔렀다.

“너무 일등 최고 그러지 말고, 우리 다 최중 되면 안 돼요? 그냥 같이, 함께 살면?”

미나리, 맛도 좋지만 골짝 그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라는, 실은 보석 같은 이 채소에 할리우드의 장삿속이 어쩌다 눈을 떴던가보다. 그의 휘황한 수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태풍의 눈에 선 듯 어질어질했다. 최고 좋다, 최고 높다가 아닌 ‘최고로 가운데’라 했다.

청마 유치환은 이 ‘가운데’의 본질을 시정(詩情)으로나마 슬몃 보았나보다. 그의 시 ‘깃발’을 다시 읽는다. 애달픔만으로는 풀 수 없는 저 뜻을 이렇게 썼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세상은 코로나 광풍 속에서, 나라는 아름다운 제 딸 여군 이 중사를 ‘살해’하고 시답잖은 법규가 용감한 소방관의 죽음을 재촉하는 불상사(不祥事)들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 최중(最中)의 큰 가르침도 그 소음의 와중에 그만 묻혀버렸다.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불씨처럼 윤여정의 그 말 ‘최중’은 다시 살아 휘날려야 한다. 깃발은 가장 중요한 곳인 한 가운데서 휘날리며, 때로 동서남북 사방의 변방(邊方 변두리) 향해 개혁(改革)을 충동질한다. 우주 속 인류의 원리다. 모르면, 잊으면 훅 간다.

인류 겨레 이웃의 ‘착한 내일’을 삼키는, ‘최고 이기심’을 깨부순 말로 본다. 윤여정의 선전포고다. 모두를 향한 사랑, ‘진짜 정치’의 틀이리라. 전쟁과 평화의 국제 정치도 같다. 미워하고 비웃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방법론이더니 끝내 목적이 됐다면, 이게 어찌 인류의 뜻이냐?

그냥 같이, 함께 사는 만물(萬物)이 공생(共生)하는 이치다. 저만 잘 사는 것의 달콤함은 좋겠지, 그러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농사꾼 전우익의 세상사는 이야기 책)의 뜻을 이미, 지식인이나 정치가보다 먼저, 세상은 알아버렸다. 이제 저를 속이면 안 된다. 윤여정 따라, 우리 최중하자.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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