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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버님 영전에 화투 한몫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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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버님 영전에 화투 한몫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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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2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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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대한민국 남자들 중에는 군대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깨어난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대한민국 남자 중 한 사람이라서 그러한 꿈도 꿀 수 있으련만 아버지를 피해서 군대를 지원했던 터라 군 복무 중에 간혹 아버지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깬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무서웠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아버지로부터 파생되는 괴로움은 컸다. 어느 작가는 악부전(惡父傳)이란 글을 썼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세상 아버지들이 존경만 받을 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술 취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제정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낮은 음처럼 음울하게 들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바로티가 되기도 하였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술에 찌들고 노름으로 한 세상을 탕진하다 생을 마감한 것으로 각인이 되어 있다.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면 아마 나도 하늘 보기가 부끄러워 김병연처럼 삿갓을 쓰고 다니게 될 것 같아 이만 줄여야겠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불효 한번 저지르지 않아 자식들 올바르게 자랐다고 주위 사람들은 말들을 하는데 어머님 사후에 불효를 한번 저질렀다. 어머님 살아생전에 말씀하시기를 죽거들랑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건만 아버님이 저승에서 술과 노름 끊고 마음잡고 잘 살고 계시니 걱정 마시라며 합장을 해 드리고는 어머님 유언 어긴 것이 죄스러워서 청개구리처럼 울어댔다.

청개구리가 엄마의 유언을 듣고 개울가에 묘를 쓰고는 비오는 날이면 묘가 떠내려갈까 봐 냇가에서 울었다는데 어머님 유언을 어긴 나는 가뭄이 들었을 때 밭작물 말라비틀어지는 것은 뒤로 미루고 부모님 묘를 물로 적셨다. 음력 섣달에 눈이라도 쏟아지면 부모님 묘의 눈을 쓸어내리며 아버님 살아생전에 원망을 했던 죄를 같이 쓸어내렸다.

지난 음력 섣달에도 눈이 왔다. 명절을 며칠 앞두고 아내와 같이 부모님 묘의 눈을 쓰러 갔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이 할아버지 묘의 눈을 쓸고자 시간을 내어 동행해 삽으로 눈을 퍼 날랐다. 어딘가 어설퍼 보여 큰소리 한마디 하려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나도 어느새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자리에 와 있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날 성묘를 가보니 천주교 묘원이라서 연도를 바치는 무리들이 있었고 술을 따라놓고 절을 하는 곳도 보였다. 어머님이 지긋지긋 하다는 술은 아버님의 기호식품인지라 묘를 돌며 부어 드렸다. 대포관주하시는 분이니 한 병 다 부어 드리란다. 망자들이 좋아하는 기호 음식을 별도로 장만해 오는 집도 눈에 띄었다.

망자가 좋아하는 것이라? 그래서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화투를 아버님 영전에 한몫 드리기로 했다. 묘원 주위의 소나무들이 일송정이요 학이라도 한 마리 날아들면 일광(一光)이다. 밑으로 보이는 마을의 매화꽃이 피면 이매요. 새가 날아들면 이매조가 되고, 드문드문 서 있는 벚나무에 벚꽃이 피면 삼 사구라며, 묘원 뒷산에 서있는 싸리나무가 사 흑싸리가 되도다.

야생 난초 피면 오 난초요, 묘원이라 그런지 화려한 꽃이 없어 육목단이 없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인데, 맘의 묘지에 세워 준 붉은 조화로 대신하면 쓰겠고, 싸리나무에 붉은 꽃피면 칠 홍싸리요. 앞산 봉우리 팔공산으로 생각하면 될 것인데, 산위로 새가 날면 팔 열끗이요. 달이 뜨면 팔 광이다.

야생 국화피면 구국진이고, 단풍나무 보이면 풍인데, 고라니라도 한 마리 뛰어든다면 풍 열끗으로는 그만이다. 야생 동물들의 똥이 보이니 십일 똥이요. 비가 오면 화투의 마지막 패패로 화투 한몫이 채워지는데, 누가 빗속에 우산이라도 받쳐 들고 성묘라도 온다면 비 광으로 제격이다.

아버님 살아생전에 그렇게 하고 싶던 노름인데 사후 세계라고 못하시면 되시겠습니까? 그래서 불초소생이 아버님 영전에 이렇게 화투 한몫 바칩니다. 묘비명마다에 천주교 세례명 새겨진 것으로 보아 아마 타짜는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아버님만 세례명이 없으신 것으로 보아 완전 아버님 판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토록 싫어하는 노름꾼이 된 것만 같다. 「부모」라는 시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아버님이 조금 이해가 된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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