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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김육의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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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e글e글] 김육의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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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10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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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조선시대에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 법이 있었다. 대동법이다. 조선시대 때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00년이 훨씬 지나서야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법이다.

김육(1580~1658)이 김영란법처럼 대동법이 그 분 이름을 걸치게 되지는 못했지만 대동법에 목숨을 건 조선시대 관리로서는 보기 드문 분이셨다.

아마 역사 공부를 깊게 하신 분들은 김육이라는 분을 대동법과 함께 들어본 이름이겠지만 일반 대부분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 분의 역사적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분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경이롭다.

대동법!
말 뜻은 누구나 다 공평하게 세금을 내야한다는 소리이다.

조선시대에는 3가지 종류에 세금제도가 있었다. 중국의 당(唐) 왕조 때 정착한 것인데, 이후 동양의 근대 이전까지 세금 제도의 기반이 됐다.

조용조(租庸調)라는 것이었다.

조(租)는 경작지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세금이다.

용(庸)은 국가에서 하는 대규모 공사에 차출되는 것이나 군에 복무하는 것을 말한다.

조(調)는 지방의 특산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금제도를 우리는 그 뜻은 정확히 모른 체 그저 외우기만 했다. 먼저 알기쉽게 간략하게 설명부터 하겠다.

조(租) 는 지금으로 말하면 토지세이다.

용(庸) (군역, 요역-군에가거나 나라공사에 몸으로 떼우는 일)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남자들의 국방의무를 말한다. 요즈음은 없어졌지만 당시는 궁궐을 짓거나 국가적 대행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일을 시켰다

조(調)는 나라에서 지정하는 지역 특산품을 바치는  일이다. 지금은 없어진 세금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지방세 정도로 알아 두자.

그런데 여기서 조선시대에는 가장 큰 문제는 조(調) 즉 다른 말로는  공납이라고 불리었다. 이 공납이 당시 백성들의 세금의 60%를 차지할 만큼 가혹할 가렴주구가 행해졌다.

즉 지역특산품을 구하기가 힘들어 엄청난 비용을 들여 지방수령과 결탁한 상인들에게 공납할 물품을 구입해서 바쳤는데 이것을 방납의 폐라했다.

방납의 폐가 심해 백성들 고통이 너무 심했기에 일부 뜻있는 관료들이 공납을 토지 소유에 따라 일률적으로 쌀로 바치게 하고 이 쌀로 조정이 직접 지방특산품을 구입하자는 주장을  펼쳤는데 바로 이게 대동법이다.

그동안 양반들은 공납제도에서 비껴 서 있었다. 그런데 토지 소유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내게 하니 양반들의 세금은 엄청 늘고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5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즉 대동법은 요즘 담배값 인상, 법인세 감소와 정반대로 "부자증세 서민감세"의 전형적인 세금정책이었다.

이러니 양반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고 대동법이 처음 실시하고나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까지는 100년 이 훨씬 넘게 걸렸다.

이런 100년 동안의 대동법 논란 한 가운데는 김육이라는 분이 계셨기에 그래도 가능했던 것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에서 보면 가짜 광해군이 당시 영의정인 이원익이 제안한 대동법을 경기도 일부에서 실시한다. 하지만 양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더 이상 확산 되지는 못한다.

김육은 광해군 당시 하위 관리였지만 광해군시대 계축옥사(영창대군 외할아버지 김제남 역모사건)에 회의를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잠곡이라는 곳으로 낙향한다.

김육은 그곳에서 토굴을 파서 살만큼 최빈곤 생활을 하며 백성들의 어려움과 관의 가렴추구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김육에게 대동법만이 백성들을 살리는 정책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다.

인조반정이후 다시 조정으로 불러나와서 효종 때에 이르러 영의정까지 하면서 오로지 대동법 실시에 자기 모든 것을 건다.

김육이 관직에 나가는 첫 번째 조건이 대동법 실시였다. 그만큼 대동법 실시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 생전에 호남만 제외하고는 조선 전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다.

죽기직전 마지막 유언도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지 못한 아쉬움과 자기 죽고나서 대동법  유야무야 될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유학자들과 지금도 조선의 최고유학자로 칭송하는 산당의 대표 송시열은 대동법의 가장 극심한 반대자였다. 그들은 백성의 안위보다는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왕이 죽고나서 대비가 상복을 몇년 입느냐의 문제로 서로의 정권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을 뿐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학문이나 말뿐이 아닌 실제 정책으로서 진정 누가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했었는지는  대동법에 대해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부 역사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완전 핍폐된 조선에서 그나마 대동법이라도 실시되지 않았다면 백성들의 민란으로 조선은 버티지 못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겼을 거라고 한다. 이 점은 좀 아쉽기도 하다. 조선말고 백성들이 직접 세운 새로운 나라가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아직까지 김육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우리나라 역사상 보기드물게 현실 정치 속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김육이 왜 지금까지도 역사적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 아직도 양반 기득권층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까?

[전국매일신문 칼럼] 윤병화 성남미래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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