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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추말리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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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추말리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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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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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우리식단의 반찬 중에서 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배추나 무, 다른 채소로 빚어낼 수 있는 김치는 종류가 다양할뿐더러 단일 품목인 김장 김치는 양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겨울 동안 수급 받지 못하는 채소를 감안하여 담그는 김치이기에 식구 수에 비례하여 김치의 양이 결정되기도 한다. 겨울 반찬을 거의 김치에 의존하다시피 하는 아내로서 김장은 일종의 제식이요, 양념에 들이는 공은 가히 신앙적이었다.

우리나라 주부들의 김장 김치 담그기의 준비 과정은 일 년 사계절이 이어진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봄이면 이장님의 소금 신청 받는 것을 시작으로 김장 김치의 양념 준비기간은 여름에는 마늘로 해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고추 말리기로 절정을 이룬다. 붉게 널어놓은 고추를 멀리서 고추잠자리라도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다.

전문처럼 묘사한 평화로운 풍경은 남들의 고추 말릴 때 풍경이고, 우리 집이 실제로 고추를 말리노라면 영 다른 상황이 연출되는데 환장할 노릇이다. 동네에서 김포장, 마송장, 더 멀리 강화장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고추 말릴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침 일찍 고추를 가득 실은 차가 동네를 순회하기도 하고, 일부의 동네 아주머니들의 고추장 마당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내는 마당에 쏟아지는 햇볕을 아쉬워하다가 급기야는 고추 한 자루를 사다가 마당에 펼쳐 놓았다. 고추 널어놓기가 무섭게 마치 아내의 고추 말리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이 흐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구름이 산 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부랴사랴 거실과 방에다 거둬들이고 빗방울 튄 것을 농약 묻은 것 이상으로 생각하여 수건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닦았다.

많이도 아닌 고추 한 자루를 여태껏 속 시원히 말려 본 적이 없다. 해마다 우리가 고추를 샀다 하면 사계절 중 날씨가 맑기로는 가을 하늘인데, 애국가 3절에도 있는 ‘가을하늘 공활한데 맑고 구름 없이’가 무색할 정도로 비가 온다.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날에 집안에서 고추 말리느라 보일러를 가동하고 선풍기는 있는 대로 돌려대니 집안에서 야기하는 불쾌지수로 고추 무르는 것 이상으로 내가 물러서 곪아터질 판이다.

고추를 사려면 먼저 일기예보도 보고 맞춰서 사야 하는데 그놈의 연속극에 미쳐서 일기예보도 못 봤냐고 질타하면, 언제 대한민국 기상대 제대로 맞히는 것 봤냐며 응수를 해댄다. 장사꾼이 파는 고추에 수입산이 섞였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맹신하던 아내는 동네에서 고추 재배하는 사람에게 고추 한 자루를 부탁했는데 그것도 못할 짓이다. 고추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미리 부탁한 것을, 볕 좋은 날은 남들 우선이고 이삼 일 비가 온다면 우리 차지가 되는 것이다. 여름장마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고추를 말리면서 가을장마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고추를 샀으니 없던 장마까지도 생긴 모양이다.

아내가 교회를 가며 날씨가 흐리기는 했어도 고추를 밖에 널어 바람이라도 쏘이게 하라고 일러둬 고추를 밖에다 널었다. 집이 마을 입구라 동네 사람들이 오며가며 고추 말리는 것에 대하여 입방아를 쪄댔다. 동네 사람 한 분이 지나다 들러서 고추 꼭지를 따두면 좀 빨리 마르니 꼭지를 따라고 일러둬 아내에게 점수 딸 요령으로 꼭지를 따냈다. 성당 갔다 오시던 육촌 형수님이 날씨가 흐리고 꾸물거리는데 고추 꼭지는 왜 땄냐고 성화다. 교회 갔다 온 아내 역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난리다. 급기야 거실과 방으로 옮겨 또다시 보일러를 가동해야만 했는데, 만질수록 물컹거리는 고추가 늘어 가는 것에 따라 아내의 잔소리도 늘어났다.

팔월의 고추밭을 지나며 옆에서 걷는 아내 들으라고 협박을 해댔다. 올해는 고춧가루로 사라고, 올해 또 고추 말린다고 고추만 사면 고추를 아예 짓밟아 버리겠다고 윽박질렀다. 내말에 겁을 먹고 고춧가루를 살 줄 알았는데, 고추를 한 자루 사서 보란 듯이 마당에 쩍 벌려 널어놨다. 내 말을 우습게 짓밟았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나도 고추 멍석을 짓밟아 버리려고 들에 있는 트랙터를 몰고 와 멍석 옆에다 전진 배치시켜 놓았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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