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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동네 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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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 동네 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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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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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아침에 일어나서 왼팔을 움직이는데 통증이 심했다. 잠결에 팔꿈치로 벽 모서리를 쳤는지 모르겠다만, 오후 들어서부터는 물주머니까지 생겼다. 걱정만 하며, 아내의 병원에 가 보라는 소리에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의료보험 카드만 들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팔이 아프면 뼈에 이상이 있을 것인즉 정형외과를 가야 하는데, 시내에 몇 군데 있는 정형외과 중에 집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가 용하다는 소리를 익히 들어왔고, 치료도 두어 번 받아 봤다. 그런데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 병원 의사가 지금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넘었다는 곳만 기억할 뿐 날짜는 모르고 연탄장사 할 때의 한겨울이었다. 얼은 연탄 던지는 것을 받아 쌓다가 손목을 접질려 금세 부어올랐다. 정형외과를 찾아갔더니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그 행동에 어울릴 정도로 상냥하게 말을 하며 손목에 반쪽 깁스를 감아 돌렸다. 의사는 부드럽게 깁스를 둘러댔지만, 내 손목은 경직됐고 마음은 불안했다. 날씨가 추워서 연탄 주문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손목은 아팠지만 깁스 한 채로 연탄을 배달했다.

며칠 지나서 병원에 가서 깁스를 푸는데 빨았다고는 하지만 거무스르함이 배어 있는 붕대가 풀어지면서 금이 간 석회덩어리가 고분 발굴할 때의 토기조각처럼 깨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의사 선생님은 경악은 했겠으나 지성인의 덕목을 갖춘지라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사근사근 타일렀다.

그 후로 언젠가 봄에 다리를 다쳐서 한쪽 다리를 발가락만 남기고 통 깁스를 했다. 논도 갈아야 하고 못자리도 해야 되는데 큰일났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신지식인으로 앞서가는 농업인은 못되더라도 불굴의 농업인 아닌가. 깁스한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자 트랙터의 의자를 떼어내고 대신 담요를 둘둘 말아서 뒤 구석 쪽으로 받치고 앉아서 구부러지지 않는 다리를 유지한 채로 트랙터 페달을 밟으며 만오천여 평이나 되는 논을 갈고 못자리까지 거뜬히 해치웠다.

깁스를 풀러 갔는데 이번에는 통 깁스가 워낙 견고해서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검정 물 대신에 개흙물이 잔뜩 들었다. 의사 선생님 눈이 가자미눈이 된 것을 보니 심기가 연 불편한 것만 같았다. 치료를 받고 살금살금 도둑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가을에 벼 베기를 앞두고 또 오른손목을 다쳤다. 육신을 밑천으로 세상 살아가다 보니 몸의 수난이 그치지를 않았다. 어찌 할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뼈에는 용하다는 그 병원을 찾아가서 이번에도 반 깁스를 했다.

콤바인으로 벼를 깎는다지만 논 구석만큼은 콤바인이 작업하기 수월하게끔 낫으로 벼를 베어내야만 했다. 낫을 잡고 벼를 베어 보니 손목에 움켜잡는 힘이 없어서 낫이 그냥 빠져나왔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이러한 때에 써먹어야 한다. 바른생활인가에 나왔던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을 볼 때 말에서 낙마하여 다리를 다치자,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다리를 잡아매어 무사히 무과시험을 치렀다는 내용을 실습으로 옮겼다. 오토바이에 달린 고무 끈을 풀어서는, 낫을 쥔 손에 고무 끈을 돌돌 감아 붙들어 묶고 벼를 베었다. 그 바람에 깁스는 금이 가서 손목에서 너덜거렸다.

풀고 매고 할 것도 없는 깁스를 풀고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의사 앞에 앉았다. 이번 깁스는 풀물이 들어 초록색이 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본 의사의 얼굴은 붉은색이 되었다. 깁스 할 적마다 붕대 색이 바뀌는 것이다. 치료하는 의사가 얼굴이 상기되어 뭐라고 하는데, 내 딴에는 미안한감에 이까짓 것 괜찮은 것 같다고 어눌하게 대꾸한 것이 화근이었다.

의사가 벌떡 일어나며 “뭐요? 이까짓 것? 그럴 것 같으면 뭐 하러 병원에 와? 당신혼자 환자 하고 의사도 하고 다 해 먹어! 간호사! 이 사람 내쫓아!” 의사는 화가 나서 깁스했던 석고 덩어리를 책상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얼마 전까지 친절하고 상냥했던 의사가 아니었다. 좋은 일도 한두 번 되풀이되면 짜증이 난다는데, 매번 깁스가 깨져서 오는, 의사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듯한 불한당 같은 환자에는 관용도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작은 규모의 정형외과 이지만 의사의 실력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전국매일신문 기고] 유재철 김포시 통진읍 도사리 꽃씨맘씨농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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