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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오징어 게임의 ‘저런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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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하제별곡] 오징어 게임의 ‘저런 자본주의’
  • 전국매일신문
  • 승인 2021.10.0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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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오징어 게임’이 지구촌을 휘감는다. 잘난 몇몇이 세상 돈 다 먹는 황당한 소용돌이다. 그 와중에 돈은 넷플릭스가 대강 다 건진다.

50억 퇴직금, 대장동 에너지가 인간을 좀먹는 그림, 도둑이 ‘적반하장!’ 고함치는 정치, 지하실 살림 그린 ‘기생충’ 영화 등의 판타지 버전이다. 강남스타일에 BTS를 잇는 한류의 폭발, 어떻게 읽을까? 최근 필자의 글 이 대목에 몇 분이 툴툴댔다.

세상 동력이었던 저런 자본주의로 이제 우리 삶을 어찌 건사하랴. ‘돈 놓고 돈 먹기’에는 군중인 루저(패배자)들의 희생이 필수다. 원래 유럽과 미국의 산업자본은 거대한 노예집단 때문에 가능했다. 노예 대신 뼈골 빠지는 자본의 식민지 우리 시민들, 허망하다. 

우리 사는 바탕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얘기였다. 글을 반만 읽었다. ‘저런 자본주의’를 가리킨 것이지, 자본주의 전반을 지탄한 것이 아니다. 세계라는 공간과 역사라는 시간에 눈을 돌려보자.

기차나 방적기를 움직인 증기기관이 서구문명을 일으킨 힘이라는 식으로 가르쳐준 우리의 교육은 반성해야 한다. 해적선 노예노동 식민제국주의가 저 마천루와 성당, 에펠탑의 성과였음을 우리는 몰랐다.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민주주의나 철학이 온전한 이념일까?

개화 이후 일본의 대박에는 36년 우리 겨레의 피땀이 엉켜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유럽’이기를 열망해왔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속뜻처럼 인간의 품종까지 바꾸려했다. 도리(道理)가 아니었으니 전쟁 일으켜 원자탄 맞았다. 미국의 애완견으로 한국전쟁에서 또 살아났다.

서구와 일본의 저 시스템, 민주주의 정치, 자본주의 살림, 기독교 정신이 갑자기 우리 사는 바탕이 됐다. 우리 전통은 미신이 됐다. 최근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버리자는 국회의원들의 입법 모의도 있었다. 국기문란, 애완견의 조건일세, 우리 주인은 미국인가.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 겨레들에게는 덕(德)이라는 이념이 있다. 진선미(眞善美)를 넘어선, 바닥부터 천상까지를 포함하는 뜻이다. 각자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는 (서양식) 정의(正義)라는 말의 허구를 벗겨버린다. 

지금은 상품의 큰 포장을 말하는 덕용(德用)이란 유통용어로만 쓰이는 것은 아닌지. 이때의 ‘크다’는 뜻이 실은 德의 핵심이다. 세상에 처해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덕이다. 세상에 처함은 인간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사람 가슴 속은 기껏 한 뼘이지만 우주를 삼킬 만큼 크다. 

사람이 곧 하늘,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거리(세상)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바른 마음으로 사는 것, 덕이다. 문자학의 어원(語源) 분석으로도 또렷하다. 

주역(周易)의 이치처럼 모든 것은 변한다(易). 이기심에서 오는 욕심과 변덕까지, 사람의 상황과 심정을 포괄하는 보편성을 너그럽게 또는 매섭게 바라보는 관점과 명상이 德이다. 진선미와 정의에 플러스 알파한 것이다. 우리 뼈에 사무친 뜻이다. 

‘오징어 게임’은 우리 마음이 버리고 살아왔던 德에 대한 회고(回顧)이고 반성이며 탁견일 것이다. 전 세계가 저렇게 화답하는 것은 격한 공감일 터. ‘한류문화의 우수성’으로만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저런 자본주의’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 ‘있는 서너 놈만 잘 사는’ 저 낡고 병든 시스템을, 인간을 바라보는 공존의 이치로 바꿀 때가 됐다.

[전국매일신문 칼럼] 강상헌 문명비평가·우리글진흥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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