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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역사 속 신분 과시 '완장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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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역사 속 신분 과시 '완장문화'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6.02.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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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고비마다 우리에게 깊은 기억을 남긴 완장은 힘 있다고 으스댄 자들의 완장이었다. 정치적·이념적 대립 속에서 '내 편' '네 편'이 갈라질 때마다 완장 찬 무리들이 등장했다.현대사에서 완장(腕章)은 썩 탐탁잖은 기억의 편린이다. 권력 하수인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수단이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 점령지에서 설친 머슴·소작인은 붉은 완장을 찼다. 1961년 5·16 쿠데타 때 서울에 진주한 군인은 ‘혁명군’ 완장을 찼다. 이승만 정권은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학교 주번이나 규율부원인 선도까지 찼던 완장은 1990년대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췄다.
완장은 지위를 넘어선 욕망의 과시다. 동양은 서양과는 달리 시민혁명의 역사적 경험 없이 자본주의에 편입돼 개인의 성취 개념이 발전하지 못했다. 이에 외형적 지위로 사회적 서열을 매기는 문화가 보편화됐다. 권력을 쥐거나 부를 축적하면 그 자체가 엄청난 완장 역할을 한다. 개인의 성공은 본인을 넘어 가문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에 지위에 대한 집착과 불안지수가 높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현대인의 불안을 ‘지위의 불안’에서 찾는다. 지위(status)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뜻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욕구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에서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과시욕으로 발전했다.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욕망은 속물근성으로 변질됐다. 유명인사의 이름을 팔며 으스대거나 아랫사람을 억압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 모두 속물근성이 외적으로 표현된 형태다.
동네깡패가 하찮은 완장 하나를 차면서 권력의 노예가 돼 가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윤흥길의 소설 ‘완장’이 있다. 출간 30여년이 지나도 권력의 패악을 얘기할 때 어김없이 거론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완장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한 줌도 안 되는 허세를 믿고 거덜먹대는 이들을 접한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테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소설 속 술집 작부의 일침이 무심코 흘려듣기엔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좋은 시절이 있었다.” 완장을 찬 사람에게는 돈 봉투가 생겼다. ‘완장’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으니 봉투를 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시골 면서기는 담뱃값을 챙기고, 힘깨나 쓰는 공직자는 두둑한 봉투를 챙겼다. 급행료, 떡값, 뇌물, 비자금…. 완장에게 어찌 좋은 시절이 아니었겠는가. “불역열호(不亦說乎)” “불역낙호(不亦樂乎)”를 줄기차게 외쳤을 터다. 돈을 건네야 했던 사람들. 그들도 기뻤을까. 그들에게도 좋은 시절이었을까.
“이래서야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생각에 ‘부정부패 일소’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부패는 뿌리 뽑혔는가. 말뿐이었다. 일소하겠다던 사람이 부패를 만들어내는 ‘큰 완장’이었던 까닭이다. 수천억원을 챙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어디 이들뿐인가. 곳곳에 박힌 큰 완장이 계속 봉투를 챙기니 작은 완장이 좇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끄러움을 알았을까. 의기투합해 봉투를 주고받자면 무슨 소리가 나오겠는가. “당연한 것 아니냐.”
부정부패를 당연시하는 과거 우리의 참담한 모습이다.지금은 나아졌을까. 완장 왈 “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덥석덥석 돈 봉투를 받아 쇠고랑을 차는 사람이 아직도 한둘이 아니지만 이런 말이 들리니 분명 달라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피아’라는 말이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관료사회, 법조계, 공기업에서 끼리끼리 짬짜미를 하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완장 중의 완장이다. 돈을 직접 받아 챙기면 뇌물이니 쇠고랑을 차지 않을 교묘한 방법을 쓴다. 바로 전관예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정책이 돈벌이 수단으로 변해 나라는 엉망으로 변하고, 법의 정의는 왜곡되며, 공기업은 부실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나라 꼴이 제대로 설 리 없다. 부패일소 백년하청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이 시대의 황희’도 분명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부패와의 전쟁.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돈 봉투 챙기는 수법이 교묘해진 것에서 ‘우공이산의 변화’를 읽게 된다. 왜 교묘해진 걸까.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완장에게는 아직도 좋은 시절이다.
건물 절반을 뒤덮는 선거 현수막들이 선거철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건만 국회의원이 되면 나라와 지역을 위해 어떻게 하겠노라는 얘기는 듣기 힘들다. 정책도 이념도 없다. 그저 친박 진박 반박 탈박 등 '박들의 전쟁'뿐이다. 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세상으로 간 대통령까지 이승으로 불러내 친노 비노 반노가 어떻고 저쩌고 하며 싸우고 있다. 한쪽에서는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는 중이다. 모두들 제각각의 완장을 차고 누구 완장이 더 힘이 센지를 겨루는 것 같다.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 안전한 곳에 숨어 있다. 작가 윤흥길이 소설 '완장'에서 저수지 감시원 완장을 찬 뒤부터 마을사람들에게 안하무인 군림하려 드는 아들 종술을 바라보는 운암댁의 입을 통해 말하는 완장의 본질이다.
총선이 완장들의 대리전쟁으로 전락한 모습은 추레하고 너절하다. 완장을 보고 표를 찍으라니 유권자를 졸로 보나 하는 말이 나오는데도 모르쇠다. 완장의 뒤에서 미래의 권력지도를 그리는 숨은 그림자들은 더 불온하다. 답답하고 유쾌할 수 없는 선거판이다.
이몽룡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금 항아리 맛난 술은 천백성의 피요(金樽美酒 千人血) / 옥쟁반 맛난 안주 만백성의 기름이라(玉盤佳肴 萬姓膏) /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은 눈물 흘리고(燭淚落時 民漏落) /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歌聲高處 怨聲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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