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혁의 데스크席] “정치의 근본은 몸가짐에 있다”

최재혁 지방부국장

2021-08-26     최재혁 지방부국장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명제는 공직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도덕률로 과거는 물론 지금도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개인의 도덕적 정진은 정치전자가 완성되면 후자는 자동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이다.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나온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큰 일을 하려거든 자기 자신과 가정을 먼저 돌봐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선거에 출마해 큰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 반드시 새겨야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대선이 채 7개월도 남지 않았다. 치국(治國)하겠다며 대선에 공식적으로 출사표를 던진 대권 주자들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헤아리고도 남을 정도다. 이번에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 사서삼경 중 대학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다. 먼저 자기 몸을 바르게 가다듬은 후(修身) 가정을 돌보고(齊家), 그 후 나라를 다스리며(治國) 그런 다음 천하를 경영해야 한다(平天下)는 의미다.

대권 주자들은 하나같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헌신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치국’의 적임자임을 자부한다. 그렇지만 대권 주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영 딴판이다. 치국을 할 수 있는 깜냥이 될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든다. 상대방 흠집내기, 미확인 유언비어 퍼트리기, 편 가르기, 지역감정 조장하는 네거티브가 거림낌이 없이 등장한다.

누가 비방을 더 잘하나 경쟁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거나 알 필요 조차도 없다. 과거에는 ‘아니였으면 아니었던 것’이 지금은 ‘아닌데도 끝까지 맞다’며 몰아가는 뻔뻔함과 막무가내가 아예 생활화 됐고 더 심해졌다. 수신(修身)이 전혀 안된 대선 주자들 탓에 대선판이 날로 치졸해진다. 정치가 더 퇴행한다.

대권 주자들게서 국가의 비전과 정책은 찾을 수 없다. 내놓는 정책이라는 게 포퓰리즘이다. 나라를 맡겨도 되겠냐는 의문이 들 정도로 저질스런 주자들도 있다. 측근들은 더 심하다. 진영논리가 우선이고, 무조건 우리편이 되어야 한다는 탐욕의 화신들이다. 그러니 추태에도 부끄러움을 못 느낀다. 수신과 제가(齊家)가 전혀 안된, 즉 깜냥이 안되는 인물과 측근들이 대권욕에만 사로 잡혀 대선판을 어지럽히고 더 저질스럽게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나라는 파탄난다.그리고 자신 마저도 파멸한다. 대한민국 권력사가 이를 입증했다.

광복 이후 12명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수신·제가가 안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퇴임 이후에도 자신도, 가족도, 측근들이 삶은 불행의 연속이다. 수신과 제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치국을 했던 탓에 본인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수신과 제가 조차도 못하면서 감히 치국을 하겠다고 나선 댓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현직에서 겨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아들과 친형제들이 감옥에 가는 모습을 봐야 하는 참담함을 겪기도 했다. 퇴임 후에는 본인은 물론 측근들도 줄줄이 구속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서로 하겠다고 난리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대권 주자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우려가 앞선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피비린내만 나는 전쟁터가 돼 있다. 수신·제가가 안된 인간들의 복마전이 지금 대선판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고 했다. 로마시대 브루투스도 “시저의 마누라는 일절 의혹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도가의 사상가 열자(列子)도 “정치의 근본은 군주의 몸가짐에 있다”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저 수신·제가한 후에 치국할 것을 가르쳤다. 수신·제가가 되지 않은 인물은 절대 정치를 하면 안되는 것이다. 자신과 측근은 물론 국민 마저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신과 제가의 길을 생략하고 치국했던 권력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수신·제가’ 할 수 있는 대선 주자들과 측근들만이 ‘치국’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교양이라는 말은 독일어 ‘빌둥(Bildung)’에서 나왔고, ‘만듦’이고 ‘형성’이라는 원래 뜻에서 ‘교육’이라는 뜻도 파생됐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고 형성해가는 것이 교육이고 교양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교양이념은 괴테 이후 독일적 전통에서 교양소설로 나타나고, 헤겔 이후에는 거대한 지성사적 흐름을 이룬다. 이때 핵심은 개인의 자기교육적 자기형성적 노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생각들이 중국과 한국의 유학적 전통에서도 ‘수신(修身)’ 혹은 ‘수양(修養)’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람이 자신을 다스리지 않고는 집도 나라도 천하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의 근본, 즉 자기를 다스리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수신의 문제다. 이 수신에는, 퇴계 선생이 보여주듯, 말과 행동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조심하고 려워하는 데서 사람은 대상을 함부로 대하는 대신 존중할 수 있다.

이황 선생의 ‘경재잠(敬齋箴)’이란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그러니까 68세 때 17살의 왕에게 ‘삼가 공경하는 잠언’으로 올린 글이다. 8개의 짧은 항목으로 구성된 그 글은 각 구절 하나하나가 모두 새겨들을 만하다.그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첫 번째와 두 번 째 글이었다. 두 번째 글은 이렇다. “문을 나서면 손님 맞듯이 하고, 일은 제사를 지내듯이 하라. 전전긍긍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감히 경솔하거나 안이하게 하지 말라. 입은 항아리처럼 다물고, 뜻은 성(城)을 지키듯 하라.”

오직 외경심(畏敬心·Ehrfurcht)에서 사람은 자신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남으로부터도 존경받을 수 있다고 괴테는 썼다. 이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자기교육방식, 즉 스스로 교양인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라, 또 일류 대학을 나오거나 무슨 박사여서가 아니라,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부단히 만들어갈 때, 이렇게 만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이미 ‘교양적’이다. 무례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또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기쁨을 위해 퇴계의 ‘경재잠’은 오늘날에도 절실한 메시지로 보인다.

퇴계가 생애 말년에, 또 평생에 걸쳐 강조한 것의 하나는 ‘경계하고 신중하며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 몇 구절 안에 사실 사람이 행해야 하는 윤리적 실천덕목의 요체가 거의 다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경재잠’의 첫 번째 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땅을 밟을 때는 가려 밟고, 개미집도 돌아가라. 앞에 인용한 경재잠(敬齋箴)의 경고에 따르면, 안과 밖에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게 된다.

마음과 행동의 한결같음은 밖으로 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인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사사로운 삶에서도, 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목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유학의 전통에서, 남이 보거나 듣거나 관계없이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신독(愼獨)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되새겨보길 바란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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