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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8차 사건 말고도 억울한 사연들 ‘수두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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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8차 사건 말고도 억울한 사연들 ‘수두룩’
  • 이재후기자
  • 승인 2019.10.13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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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매일신문 이재후기자 >20년간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진범으로 검거돼 수형생활을 한 윤모 씨(검거 당시 22)가 결백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과거 억울한 누명을 썼던 사람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강압적인 경찰 수사에 못 이겨 처벌을 감수한 채 허위자백을 했던 이들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후유증으로 숨지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경찰은 아무런 증거 없이 의심 가는 용의자를 상대로 폭행과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미리 설계한 대로 자백을 받아내 범인으로 특정하기도 했는데, 이런 그릇된 수사방식은 현재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다.

    화성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사람은 윤 군 한 사람만이 아니다. 과학수사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어서 사건 현장 보존 등 초동조처는 엉망이었고, 지문이나 혈흔 등 증거물 수집이 제대로 안 될 때가 많았다.

    이는 폭행과 가혹행위로 자백을 강요하는 수사가 버젓이 이뤄진 하나의 배경이기도 하다.

    아무런 죄 없이 경찰에 끌려갔던 사람들 일부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1990년 12월 18일 화성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조사받은 차모 씨(당시 38)가 화성 병점역 부근 열차 건널목에서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어 1991년 4월 17일에는 화성 10차 사건과 관련한 수사대상자인 장모 씨(당시 33)가 오산의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소설이나 다름없는 황당한 제보로 인해 경찰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도 있다. 1997년 2월 10일 김모 씨(당시 45)가 수원 자택에서 숨져 있는 것을 아내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 씨는 1987년 1월 화성 5차 사건 발생 이후부터 경찰 감시를 받아오다 1993년 5월에 이르러서는 한 재미교포의 제보로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으로 기록된 화성 사건의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에 달한다. 이런 점에 미뤄보면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로 고통받았으나, 피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후기자 goodnews@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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