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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같이의 가치’를 위한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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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같이의 가치’를 위한 기부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18.10.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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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귀족에게는 의무가 따른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4세기 백년전쟁을 만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영국군에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점령자는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여섯 명의 목을 요구했다.

칼레 시민들이 머뭇거리자 이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자 곧이어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이 잇달아 동참했다. 그러나 영국 왕은 죽음을 자처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해 그들을 살려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바로 이 일화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 표현의 역사는 좀 더 고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 귀족들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신을 불문율로 삼았다. 로마제국의 귀족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노예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리무바이가 있나.2000년 개봉해 세계적 찬사를 받은 영화 와호장룡의 대사다. 무당파의 고수 리무바이가 가지고 있던 청명검을 둘러싼 얘기다. 청명검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는 스토리다. 누군가에게 ‘청명검’은 권력, 명예일 수도 있고, 또 많은 이들에겐 떼돈일 거다.
 
리무바이가 후학들에게 전하려던 바는 아마도 위 대사일 테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쥐고 있을 수 있는 영원한 건 없다. 내려놓아야만 참된 것을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다.’
 
리무바이 역을 맡은 홍콩 영화계의 거목 저우룬파(주윤발·63)가 최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약 8100억원대 재산이라니…. 싱가포르 갑부의 딸이란 그의 아내도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어쩌면 저우룬파는 리무바이의 현신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떵떵거리며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집은 적어도 서울 강남에 30평대 아파트가 있고, 고급 수입차를 굴리며, 물 건너온 명품으로 몸을 감싸야 할까.

누구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려울 텐데, 혹자는 ‘적어도 현금 20억원 남짓이면 더 이상의 돈은 별 의미가 없다’고도 한다. 혹시 너무 많은 재산이 지금 자신에게 모여 있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번 기회에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럼 왜 우리는 놓지 못하는가. 일단 인생의 업보인 자식새끼 때문이다. 저우룬파에게 자녀가 없는 점도 결단에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수년 전 역시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한 다른 유명배우는 얼마 전 말을 뒤집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들 때문이라고도 하니 씁쓸하다.
 
우리가 아등바등하는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노후 걱정이다. 여기서 S·K·Y로 대표되는 학벌이 불거지고, 강남 집값 타령을 비롯한 부동산 문제가 얽히고설킨다. 우리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에 가까운 정글이다.

이런 실타래를 끊을 진짜 ‘청명검’은 뭔가. 사실 답은 웬만큼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후 걱정을 덜어주는 복지체계가 모범답안에 가깝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살면 늙어서 호강은 못해도 폐지를 주워야 하는 걱정은 떨치게 해야 한다. 공부머리가 안되는데 굳이 학원 뺑뺑이를 돌리거나, 빚내가며 ‘엉터리 학종’을 억지로 채울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악연이 끊길 것이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옛말이 있다. 만약에 재벌 총수가 자식에게 최소한 삶을 보장할 만큼만 빼고 전 재산을 환원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의 아들, 손자까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닐 공산이 크다. 누구든 한두 번 미끄러지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대한민국 사회다.
 
지분 일부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며 모두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하는 총수일가들 모습에선 깃털 같은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리무바이가 극중 대나무를 타는 모습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에리히 프롬의 ‘존재’ 개념이 뇌리를 파고든다. 무소유와 존재는 동의어다. 스님의 말씀을 되새겨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아무도 모르게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예수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와 다를 바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

삶은 소유가 아닌 ‘있음’이며, 가장 신비로운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바로 존재를 가리킨다. '맑은' 가난과 향기로운 '소리' 역시 그러하다. 마음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으니 참으로 홀가분하다. 그 선택은 너무나 값진 것이다. 향기를 맡는 것 자체가 가지고 싶은 욕심의 발로이니 꽃에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그래서 '문향(聞香)', 즉 향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스님의 일갈은 프롬의 존재 개념을 적확하게 설명해준다.

스님의 평생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인가’였다. 이 또한 프롬의 ‘인생은 (매순간) 선택’이라는 정의와 맥을 같이 한다. 소유가 존재를 잠식한다는 프롬의 법칙은 법정의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말과 뜻을 같이 한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결정적인 실천법을 내놓는다. ‘행동으로 존재하라!’ 그 말이 벼락같이 머리를 후려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속에서 빛나는 지금 우리의 한류처럼 1980-1990년대 홍콩 배우들도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다. 당시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홍콩 배우들이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나 노래 홍보를 위해 방한하거나 심심치 않게 국내 광고에도 출연하는 등 국내 톱스타들 보다 더한 이목을 받았다.

여기 무소유와 존재의 삶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한 ‘히어로’가 있다. 영웅본색과 도신 등으로 익히 알려진 홍콩 배우 주윤발. 그가 최근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게 우리 돈으로 물경 8000억 원이 넘는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돈은 행복의 원천이 아니다. 내 꿈은 행복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의 울림 그 자체다. 아니 철학의 핵심을 표현했다고 해야 하나.
 
가난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돈벌이에 나섰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였다. 그렇게 알뜰살뜰 모았던 재산을 모두 내놓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배우로서의 삶을 보더라도 그는 완전 ‘별종’이었다. 휴대전화를 무려 17년 간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최고급 세단을 마다하고 지하철을 타고 다녔으며, 한 달 10만 원 남짓한 용돈으로 버텼으니 그런 ‘짠돌이’가 없다. 그렇게 힘들게 쌓아올린 탑을 한순간에 허문다? 그건 순간의 선택일 수 없다. 평생 마음에 차근차근 쌓아올린 덕이었던 거다. 다만 행동으로 실천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여겼을 뿐.

주윤발, 삶의 달인이자 공감력 고수임에 틀림 없다. 공감이란 게 별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다. 기쁠 때 함께 웃어주고 슬플 때 옆에서 어깨를 기대어주는 것, 그게 바로 공감인 것을.

그는 마음속 화두를 죽비 삼아 우리와 사회를 향해 세차게 내리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평화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걱정 없이 남은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윤발은 자발적 기부를 통해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줬다. 부럽다. 참으로 그가 부럽다. 무소유와 존재의 삶을 실천하는 용기를 가진 그가.‘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성을 보였다는 극찬이 아깝지 않은 그다. ‘같이의 가치’를 위한 기부의 나비효과가 필요한 요즘이다.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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