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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99] 소박한 돼지꿈을 꾸는 기해년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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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99] 소박한 돼지꿈을 꾸는 기해년 아침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9.01.0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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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새해라고 해서 궁핍한 삶이 나아지고, 천지개벽하듯 갑질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지만 나의 궁핍함이 위로를 받고, 을들의 희망을 위해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한다.-

기약하지는 않았지만 기약한 그날처럼 새해 첫날이 어김없이 밝았다. 오늘 아침 우리는, 새해처럼 그렇게 기약이야 없다손 치더라도 다시금 희망의 이름을 새기는 출발점에 섰다.

지난해는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일촉즉발로 치닫던 한반도에 평화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판문점과 싱가포르, 평양을 오가며 남북 정상은 1년 동안 세 번씩이나 만났다. 평양회담에서는 두 정상이 백두산을 함께 오르는 장면도 연출했다. 정상회담의 성과로 비무장지대(DMZ)내 감시초소(GP)가 철거되고 지난해 말에는 남북간 철도와 도로가 연결됐다.

북한 김정일 국무위원장의 남한 답방이 연기되고, 북미간의 핵협상은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지만 아무리 폄하해도 한반도의 전쟁 위기는 수위가 내려갔다.

하지만 국민을 웃음 짓게 한 일은 거기까지였다. 국민들은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분노했고, 비워가는 호주머니를 보며 한숨지었다.

권력자와 가진 자들의 갑질은 여전했고 그들은 그를 당연시 했다. 한국미래기술 양진호 회장의 갑질과 엽기행각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잊혀질 권리'의 저자 마커그룹 송명빈 대표의 직원 상습폭행, 갈취 등에 대한 갑질 동영상이 세밑을 어둡게 했다.

국회의원이 신분증 확인을 요구하는 공항직원을 상대로 자신의 권세를 자랑해놓고는 지레 갑질 당했다고 우기는가 하면, 국회의원이 지역구민 앞에서 침을 뱉는 세상이었다.

허접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웃지못할 꼬락서니를 보고 또 본 한 해였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정치권과 문화계, 학계 등에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던 자들의 왜곡된 성문화는 미투운동으로 그 추한 민낯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미투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면서 그동안 우리사회가 권력과 권위에 의한 성폭력이 얼마나 일상처럼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했다. 미투운동은 우리사회를 변화시키는 약자들의 용기로 메아리쳤다.

희망은 가혹했다. 최저임금 인상은 아르바이트생과 편의점 주인으로 대별되는 약자끼리의 갈등이 되었고, 재판을 정치권력과 밀거래하던 양승태 대법원의 더러움이 세상에 드러났으나 사법부는 제식구 감싸기라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근혜는 재판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고, 이명박은 ‘다스의 실소유주’라는 사법적 판단과 함께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원, 추징금 82억원의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부끄러운 행위는 그들의 몫인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은 국민들이었다.

하늘높이 치솟던 대통령과 집권당의 인기가 날개 없이 추락하고, 반성 없는 야당이 반사이익으로 어깨춤을 추는 세상에서 국민들은 그저 착잡하기만 한 한해였다.

희망은 어려운 사람일수록 절망이 되었고, 절망은 가진 자 일수록 희망이 되었던 무술년 개띠해였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그 어려운 한 해를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용기있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참아도 힘들거들랑 ‘개 같은 한 해였다’고 치부하고 새해를 맞자. 개한테는 미안하지만 마음속으로 욕지꺼리 좀 한다고 해서 인격이 개 같아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새해라고 해서 궁핍한 삶이 나아지고, 천지개벽하듯이 갑질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지만 나의 궁핍함이 위로를 받고, 을들의 희망을 위해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한다.

새해에도 우리는 여전히 궁핍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남북간, 북미간 줄다리기는 여전하여 평화는 아직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새해에도 갑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인양 기고만장할 것이다. 정치권력은 지난해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어쩌면 더 당리당략에 얽매여 싸울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젊어서 절망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오늘은 새롭게 길을 나서자. 희망이 고문이 되더라도 세상을 이겨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기도하듯 맞는 새해 아침이다. 고인이 된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는 새날의 기도이기도 하다.

‘매양 추위 속에/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파릇한 미나리 싹이/봄날을 꿈꾸듯/새해는 참고/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60년, 아니 600년만에 찾아 온다는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띠 해다. 먹을 것을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탐욕의 돼지처럼 물신의 해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저 돼지꿈의 소박한 행운이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2019년을 기대한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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