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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늘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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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늘 불편하다
  • 박희경 지방부국장 포항담당
  • 승인 2019.01.02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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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경 지방부국장 포항담당

사람들 마다 연말이 되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정도는 있을 것이다. 경청하였는가이다. 경청의 필요 가운데 하나는, 나 위주의 판단이 아니라 상대방 의견과 내 의견이 교집합 되는 면적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다분히 직업적 관성에서 비롯한 질문이다. 자기 불만에서 기인한 타인에 대한 폭력을 견제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청이란 나와 상대방의 교집합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교집합 밖에 있는 상대방의 독자적인 의견을 가려내는 방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경청은 늘 불편하다. 그 이후에는 경청보다 더 모진 인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보편성에서 벗어난 나와 다른 상대방의 의견은 이해하는 것부터 어렵다. 생각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경청이란 상대방에 대한 조응을 전제한다. 자극을 받아야 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러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상대방의 의견이 자기 기준에서 전부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다. 보편성에 배치되어 고려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다른 의견은 보편적이지 않은, 또는 나와는 다른 생각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

하물며, 내 의견이 틀렸고 상대방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당장에는 알 수 없는 처지이고, 상대방 의견이 억압과 편견·기득권의 적폐를 혁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낼 수 없는 처지라면, 자신의 단견을 뒤로 밀어놓고 다른 의견을 통해 내일을 예측해 보는 기회들은 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청을 잘 하지 못한다. 내 생각이 보편적 가치에 준거하기 때문에 내 의견이 정당하다고 믿는 탓이다. 스스로 균형을 잃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눈에는 다른 의견이 이상하기만 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진다. 나와 다른 생각의 결정을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낭비라는 생각이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의 구동존이는 중국의 탁월한 외교지도자이자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대표들이 모인 반둥회의에서 중국측 대표로 연설한 평화공존 5원칙에 대한 보충발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피력하면서 유래되었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부터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 미국과 중국으로 대별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적 차이에 따른 각국간 갈등이 팽배했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자는 구동(求同)과 진영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존이(存異)는, 당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 국가가 국제사회 속에서 확보해야 했던 당위(외교적 지위)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중국을 비롯한 그들 국가의 외교적 방향성의 천명이었다. 이후 특히 중국은 국제사회 속에서 진영논리를 허물고 서구열강들 속에서 동등한 경제·외교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구동존이의 효과와 영향력을 확인한 중국은 현재까지도 그 정신을 외교 제 1원칙으로 준수하고 있다. 구동존이가 혁명적 키워드로서 국제사회가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하는 사이 중국이 뜻하는 바를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스스로에게 경청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본적이나 있을까. 사드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고 해 보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 태도 그 어디에서도 구동존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국내에서 혐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대한민국으로 향하려는 중국 관광객들의 발을 묶고, 한류문화유입을 차단하고, 남북화해와 북핵 문제에 뒷짐을 졌다. 중국 정부의 치졸한 행태는 사회주의 체제를 십분 활용하는 일사분란한 행동을 주도하면서도 시장에 개입하지 않은 척 중립을 지키는 척 시치미를 떼는 데서 드러난다. 사실, 저우언라이의 구동존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동은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적극적인 배려의 준칙인 인(仁)의 개념에서 존이는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는 소극적 배려의 준칙인 서(恕)의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1955년 반둥회의의 중국대표 보충발표문에 직접 논어(論語)의 관련 구절을 인용했다는 점도 확인했다. 2,400여년이 지난 인도주의적 세계관을 함축한 표어로 세상을 새롭게 바꾼 것인데, 건국 초기부터 구문화(舊文化) 개조라는 구실 하에 공자의 사상과 논어 비판을 줄기차게 행해 온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가 구문화의 정점에서 새 시대의 돌파구를 찾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래서 경청은 늘 불편하다. 그 이후에는 경청보다 더 모진 인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보편성에서 벗어난 나와 다른 상대방의 의견은 이해하는 것부터 어렵다. 생각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경청이란 상대방에 대한 조응을 전제한다. 자극을 받아야 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러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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