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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05] 그댄, 봄 구경을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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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05] 그댄, 봄 구경을 좋아하시나요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9.03.27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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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계절이 꽃으로 물들고 있지만 봄날은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나고 있다. 온 세상을 활짝 웃게 했던 봄날의 꽃이 금세 가는 것은 무엇일까. 부질없는 욕심에 대한 경계인지도 모른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산동마을의 열아홉 살 처녀 백부전(본명 백순례)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니, 오빠를 대신하여 죽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노래를 불렀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한 채로/ 화엄사 종소리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백부전이 불렀다는 ‘산동애가’의 한 대목이다. 세월이 지난 뒤 사람들이 노랫말을 다듬고 곡을 붙여 음반을 냈으나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백부전의 큰 오빠는 일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는 여순사건으로 처형됐다. 셋째인 막내 오빠마저 여순사건과 관련돼 끌려가게 되자 부전은 대살(代殺)로 대를 이었다.

실존인물인 백부전은 노랫말처럼 꽃봉오리 같던 열아홉 나이에 좌우익 이념싸움의 현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산동면 일대는 어느 쪽이었고, 어느 쪽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목숨줄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던 곳이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에 들어왔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마을을 점령했다.

사람들은 면사무소 뒤 공터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노고단 골짜기에서 집단으로 죽거나 또는 홀로 죽어야 했다. 기구한 삶이었고, 기구한 죽음이었다.

산동마을이 노란 산수유꽃으로 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지난주에 산동마을의 산수유꽃 축제가 끝났으니 길을 가득 메우던 발길은 뜸해졌겠지만 꽃은 아직 흐드러져 한세상을 이루고 있을 테다. 못다 핀 삶에 대한 회한처럼 산수유꽃은 봄볕에 제일 먼저 얼굴을 내민다. 산동마을의 산수유꽃를 보며 마음껏 웃지 못하는 이유이다.

봄구경, 꽃구경이 마음 저미는 이유는 굳이 아픈 역사가 아니더라도 또 있다. 오늘은 활짝 꽃피우더니 내일이면 벌써 낙화하는 꽃에서 봄날 같은 우리의 삶을 보기 때문이다.

산수유가 지고 매화가 또 지면 세상은 다시 벚꽃으로 가득할 것이다. 굳이 진해 군항제를 보지 않더라도 어느 곳에서나 눈꽃처럼 화사한 벚꽃에 취하게 될 것이다.

김옥란 시인은 이러한 벚꽃을 보고 ‘벚꽃은 피는데 사랑도 피던가’라면서도 이내 ‘벚꽃은 피는데 사랑은 지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녀의 시 ‘벚꽃은 피는데 사랑은 지는가’를 조금 더 옮기면 피는 꽃이 마냥 기쁘기만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얀 눈꽃같은 꽃송이는 흐드러지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가녀린 몸짓을 흔들고/ 생전에 지지 않을 것처럼/ 저리도 웃고 있건만/ 벚꽃같은 우리네 사랑은 지는가/...(중략)/ 벚꽃아, 사랑아,/사람들은 저마다 너를 보면 감탄하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름다워라 마음껏 아름다워라/ 내일이면 너도 지고 사랑도 떠나간다’ 내일이면 질테니 피는 시간만이라도 마음껏 아름다우라는 시인의 노래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안도현 시인의 ‘벚나무는 건달같이’라는 시는 훌쩍 피었다 금세 지는 벚꽃에서 돈 떨어진 건달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군산가는 길에 벚꽃이 피었네/ 벚나무는 술에 취해 건달같이 걸어 가네/ 꽃 핀 자리는 비명이지마는/ 꽃 진 자리는 화농인 것인데/ 어느 여자 가슴에 또 못을 박으려고.../돈 떨어진 건달같이/ 봄날은 가네’라고 노래했다.

꽃이 피는 것이 비명이라면 꽃이 진 자리는 화농으로 남는 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사는 것일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봄구경, 꽃구경에 빠질 수 없는 노래는 백설희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봄날은 간다’일 것이다. 1절만 흥얼거려보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계절이 꽃으로 물들고 있지만 봄날은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나고 있다. 온 세상을 활짝 웃게 했던 봄날의 꽃이 금세 가는 것은 무엇일까. 부질없는 욕심에 대한 경계인지도 모른다.

봄날의 질문을 요즘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들에게 던지고 싶다. 뇌물에 강간혐의를 받던 중 밤길에 도망가다 들킨 전직 차관이며, 집을 서너 채나 갖고 있으면서도 투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장관후보자며, 불리하면 ‘좌익’이라고 생떼를 쓰는 야당국회의원이며, 인기에 취해 우쭐거리다 한 순간 수렁으로 빠진 젊은 연예인이며, 길가에 지천으로 핀 개불알꽃보다 못한 그들에게 봄구경이나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계절이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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