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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18] 정치인의 삭발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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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18] 정치인의 삭발 퍼포먼스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9.09.18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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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할 일을 못해 국민들께 용서를 빌어야 할 때 정치인의 삭발이 필요하다. 조국문제를 핑계로 민생과 산적한 입법을 내팽개친 정치인의 삭발은 진정성을 의심받는 퍼포먼스일 수밖에 없다. -
 
 
 
삭발의 헤어스타일이 여의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추석 명절 연휴 직전에 무소속의 이언주 의원이 삭발을 하더니 뒷날에는 자유한국당 박인숙 의원, 김숙향 동작갑 당협위원장도 머리를 밀어 버렸다. 급기야 추석연휴가 끝나자 마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마저 헤어스타일을 삭발로 바꿨다. 이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효상 의원, 송영선 전 의원, 이주영 의원, 심재철 의원이 뒤따라 삭발 릴레이 바톤을 이어 받고 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가 이언주 의원의 삭발에 대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삭발이냐”라고 극찬한데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상 초유 야당 대표까지 동참할 정도로 삭발이 대세가 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다 어쩌면 정당의 정체성 구분을 보수와 진보가 아닌 삭발과 비삭발의 의원으로 구분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긴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용 언어 일뿐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좌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 보다 머리를 민 의원과 밀지 않은 의원으로 소속 정당을 구분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성 싶다.

삭발은 ‘큰 가위’라는 뜻의 라틴어 ‘Tonsura’에서 유래된 말로 중세에는 삭발이 성직자와 세속인을 구별하는 기준이었다. 신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삭발을 했으며 자른 머리카락을 신에게 바치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의 수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삭발은 7세기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일상적인 일이었고, 불교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승려의 입문 의식으로 남아있다.

요즘은 삭발이 종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수단으로 상징화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노조의 투쟁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삭발한 ‘까까머리’는 한국 남성들이 대부분 경험하는 국민의 의무에 따른 의식이기도 하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에 나오는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 진다 마음까지...’라는 대목은 경험한 자만이 느끼는 가슴 뭉클함이다.

추석 연휴에 삭발을 한 두 여성의원이나, ‘94만분의 1의 확률’이라는 두드러기 가려움증(담마진)으로 병역을 면제 받은 황교완 대표의 삭발은 병역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에서 아마 처음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조국법무부 장관 임명에 따른 투쟁을 위한 결기를 보여주기 위해 생애 첫 삭발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삭발이어서 일까. 국민들은 공감하기보다는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본인들이야 순수한 투쟁의지의 결기를 보인다며 억울해 하겠지만 다른 속내가 숨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찬반 여론이 확연히 나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은 야당으로서는 투쟁의 가치가 있는 사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 여성의원은 학교급식 노동자들을 ‘밥하는 동네 아줌마’로 비하했고, ‘철새의원’이라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다른 여성 의원은 친인척 보좌진 채용논란으로 공개사과 한 바 있다. 삭발을 하려거든 그 때 했어야 한다.
 
때문에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은 삭발이 총선을 앞둔 공천논의를 의식한 것이 아니냐하는데 모아지고 있다. 황 대표 역시 의심받는 리더십을 어떤 방식으로 던지 보여주어야 한다는 위상 확립이 절실한 때다.
 
대안정치연대 소속 박지원 의원은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는 의원직 사퇴, 삭발, 단식이다. 사퇴한 의원은 없고, 삭발해도 머리는 자라고, 단식해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다”며 신랄하게 비꼬왔다. 국민들이 이런 비아냥에 더 수긍하는 이유를 한 번쯤 새겨봐야 한다.
 
내년 4월 총선으로 임기가 끝나는 20대 국회는 법안 통과율이 역대 최저인 30.5%에 머물고 있다. 상임위에 복수의 법안 심사소위를 두고 월 2회 이상 열도록 한 ‘일하는 국회법’은 시행 두 달째 지지부진이다.

국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국회는 세비만 꼬박꼬박 챙기며 놀고 먹고 있다. 국회는 정략적 당파싸움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쌓이는 나라걱정은 국민들이 하고 있다.

삭발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할 일을 못해 국민들께 용서를 빌어야 할 때 정치인의 삭발이 필요하다. 검찰이 칼을 바로세워 수사하고 있는 조국문제를 핑계로 민생과 산적한 입법을 내팽개친 정치인의 삭발은 진정성을 의심받는 퍼포먼스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의 삭발은 석고대죄의 표현이 아닌 이상 모두 흥행에 실패한 쇼에 불과하다. 결기를 보인다면 차라리 목숨을 건 단식이 더 감동적일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은 그렇게 했다.

그래도 삭발을 이미 했으니 ‘이 땅의 젊은 청년들이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삭발을 한것이 이런 마음 이었겠구나’하는 것 정도는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맹탕 삭발은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은 이유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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