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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투(#M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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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투(#ME TOO)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2.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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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JTBC 뉴스 룸에는 현직 여검사가 법무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후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글을 올린 후, 정식 인터뷰를 해 엄청난 파문이 일고 있다. 뉴스에 따르면 이 여성검사는 “2010년 10월30일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한 당시 법무부 간부 안모 검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으나 당시만 해도 성추행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검찰 분위기, 성추행 사실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검찰의 이미지 실추, 피해자에게 가해질 2차 피해 등을 이유로 고민하던 중, 당시 소속 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가 됐다”고 폭로를 했다.

이어 “나는 평범하게 일하는 검사이고, 내가 겪은 일련의 일들은 부당하다고 법무부 등에 의사를 표시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답변은 ‘검사 생활 얼마나 더 하고 싶냐, 검사 생활 오래하고 싶으면 조용히 상사 평가나 잘 받아라.’라는 것뿐이었다.”고 밝혔다.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사실이 아니라면 현직 검사가, 그것도 여성이 저럴 리가 없다. 검찰 간부의 성추행을 폭로한 여검사의 용기가 한낱 ‘보직 불만’에 따른 한풀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서 검사는 피해를 폭로한 뒤 2차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출마하려는 거 아니냐”는 등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거나 “별로 안 예쁘던데”라는 성희롱에 가까운 폄훼도 눈에 띈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가 ‘대한민국 미투(#Me Too)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막말로 ‘강간을 당한 것도 아닌데’라는 압박 속에서 자의와 타의로 침묵하던 많은 ‘제2의 서지현’들의 증언이 잇따른다. 이들의 목소리 연대는 사회에 만연했던 성추행과 성희롱도 명백한 폭력임을 인지케 했다. 우선은 그 자각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희망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검찰 조직을 걱정하는 논리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왜 8년이나 지나서 폭로하나”, “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 “조직의 치부를 들췄으면 조직을 떠나야지”라는 힐난이다. 개인의 피해에는 관심도 없고 조직 이미지 실추를 걱정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조직을 앞세우는 이런 논리는 허상에 불과하다. 개인의 기본권조차 보호하지 않는 조직이 추구하는 ‘공익’이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톨스토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남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말"이라고 했다. 서 검사의 피해나 고통은 알 바 없고 나만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극도의 이기주의를 경계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성폭력은 한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성차별적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그래서 남성들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하지만 이 또한 개인의 힘만으론 어렵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구각(舊殼)을 깨는 일은 더 어렵다.

지난달 25일 미국 미시간주 랜싱 법원에서 징역 175년형을 선고받은 래리 나사르(54)의 성추행 사건은 피해자의 용기있는 폭로와 사회적 연대의 위력을 보여준 사례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였던 나사르는 30여 년간 156명의 10대의 여자 선수들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의 범행은 2016 리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레이첼 덴홀랜더의 첫 신고로 드러났다. 덴홀랜더는 15세 때부터 3년간 나사르한테 성폭행당했다. 미국 체조협회는 이를 인지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7일간 진행된 증언에서 한 명씩 나와 나사르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가슴에 묻었던 말을 꺼냈다.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인 앨리 레이즈먼은 “이제 나는 커서 내 힘과 목소리로 진실을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전직 체조선수 제이드 카푸아는 “나는 더 이상 당신 때문에 부서지고 깨진 채로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도나 마컴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즈마리 아킬리나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이 겪은 학대는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추행 피해를 털어놓으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퍼붓는 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피해자의 상처를 바라보지 않고 ‘피해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가해자를 골탕먹이려는 처사는 아닌지’ 등 갖가지 색안경을 들이댄다. 달은 제쳐두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나사르는 선고를 앞두고 판사에게 편지를 보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무고했다는 취지다. 물론 변명에 불과했지만 성범죄 가해자의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끝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확산되는 국내 미투(Me Too) 운동은 침묵하던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경찰대 출신 전직 여성 경찰관과 경기도의회 의원도 최근 SNS를 통해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털어놨다. 전직 경찰관은 직속 상관한테서 성희롱을 당한 뒤 상부에 신고했지만 가해자는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도의원은 “노래방에서 한 동료 의원이 춤추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바지를 벗었다”고 했다.

조직의 위계질서는 상급자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그 힘은 성추행이나 성희롱 피해자의 입을 봉쇄하고 사회적 연대를 차단한다. 법무부도 성희롱·성범죄 대책위를 꾸려 서 검사에 대한 2차 피해를 막겠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정부나 법에만 의존하기엔 역부족이다. 피해자들의 용기와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조동화는 ‘나 하나 꽃피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나 꽃 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 W. Emerson)은 "모욕과 박해에 굴복하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의 은인이다"고 말했다. 우리는 적어도 서 검사처럼 침묵을 깬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어느 날 ‘성추행’이라는 날벼락을 맞고 악몽같은 삶을 버텨온 그를 고마운 은인으로 여겨야 한다. 아직도 어둠속에서 자신을 학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힘을 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내 가족이 당했다면 도끼라도 들고 나설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처에 소금까지 뿌려서야 되겠는가.
 
미투 운동의 연대와 응원 없이도 성범죄에 대해 절도나 폭행처럼 신고가 자연스러워지고, 성범죄피해자가 숨어서 혼자 입술 깨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지금의 들끓는 공분이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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