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매일신문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지방시대
지면보기
 표지이미지
세습경영을 보는 시선
상태바
세습경영을 보는 시선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4.26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에는 ‘갑질(gapjil)’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말은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언어공동체의 수준이나 문화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고 했다.

 

오너 3세의 ‘물벼락 갑질’은 국민적 공분을 낳았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3월 16일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폭언하면서 음료가 든 종이컵을 던진 사실이 지난 12일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오너 리스크로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고 주가가 하락한 것은 물론, 임직원까지 사회적 지탄을 받는 등 피해가 확산한다. 외신까지 사건을 대서특필해 국제적 망신을 산 데다 재계 전체의 신뢰에도 먹칠을 했다.

 

대한항공의 한 직원이 공개했다는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도 논란이 됐다. 조 전무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고함 소리는 분노조절장애자와 같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2014년 12월 5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에 이어 사회적 파문이 재연된다.

 

재계 일각에서는 사소한 일을 언론이 지나치게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재벌가 자녀의 갑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외신에서도 화두에 오른 갑질을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 직원이나 하도급 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소개했을 정도다.

 

로마제국 흥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는 로마시대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이후부터 콤모두스가 즉위하기까지이다”. 로마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5현제(賢帝) 시대를 일컫는다. 96년부터 180년까지 84년간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명의 스마트한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며 증흥기를 이끌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혈연을 통한 세습황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반면 5현제 시대를 전후해 즉위한 두 명의 황제, 도미티아누스와 콤모도스는 세습황제였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직전 황제인 티투스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부친으로부터 황위를 세습한 케이스였다. 그가 전쟁과 공포정치에 주력하다 암살당한 후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가 네르바였고, 그가 5현제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이후 4명의 황제는 제국을 발전시킬 최적의 인재를 물색해 양자로 들인 후 자리를 물려줬다. 혈족 세습이 아니라 공인과 검증을 받은 재목을 찾아 권력을 맡기는 발탁의 방식으로 황제를 뽑은 것이다.

 

이 합리적 관행은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러 깨졌다. 황제의 친아들인 콤모도스가 권좌를 물려받은 것이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는 콤모두스가 휘하 장수인 막시무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던 부친을 살해하고 황권을 찬탈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과 다르다. 콤모두스는 신을 자처하며 검투사 경기에 탐닉하다 암살당한다. 이후 로마는 유력한 장군들이 황제 자리를 주고받는 `군인황제시대'에 돌입하며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세습이 중단되자 번영이 시작됐고 세습이 재개되면서 침체에 접어든 것이다.
 
한 가문의 혈통에만 의존하는 리더 배출 방식의 치명적 위험은 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가 지난 대한민국에서 세습의 폐단이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엽기적 갑질이 드러나며 대기업 세습경영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논란에 불을 댕긴 조현민 전무의 일상적인 직원 학대는 전문가들이 심각한 분노조절 장애로 진단하고 병원 치료를 주문할 정도이다.

 

자식들의 일탈만이 아니다. 회장에게 인사를 크게 한 죄로 면직된 직원에, 처음 본 회장 부인을 할머니로 불렀다가 회사를 떠난 직원도 있다고 한다. 밀수 의혹도 받아 일가가 관세청으로부터 자택 압수수색을 당했다. 통관 없이 사치품을 밀반입하는 과정에 직원들이 동원됐다고도 한다. 이들 가족이 타는 비행기의 부품을 다른 새 비행기의 부품과 교체했다는 믿기 어려운 폭로도 나왔다. 사주를 위해 승객 안전을 희생했다는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항공사 문을 닫아야 할 일이다.
 
총수 일가의 횡포가 여론의 지탄을 받으며 대한항공은 주가 폭락으로 수천억원의 피해를 보고 있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손실은 국민의 피해로 직결된다.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직원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봉건적 사고, 한 가지만으로도 대한항공 일가는 경영인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카카오톡에 개설된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에는 나흘 만에 대한항공 직원 600여명이 참여해 갖가지 비리를 폭로했다. 직원 대다수가 벼랑에 몰린 경영인을 방어하기는커녕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조직이 깊이 병들어 있음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대한항공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이 장악한 대한민국 경제의 80%가 세습경영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않아도 우리 기업들이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같은 미래산업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진단이 속속 나오는 판이다. 대한항공 사태를 보면 무능한 재벌 3세, 4세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 경영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글로벌 격량기를 헤쳐나갈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0대 그룹이 쌓아놓은 사내유보금이 515조원을 돌파했다. 사회는 최저임금조차 수용하지 못해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재벌들은 투자보다 제 집 곳간 채우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글로벌 전략보다 당장 돈이 되는 국내시장 곳곳을 공략하는 문어발 전략에 몰두한 결과이기도 하다. 능력을 검증받은 전문 경영인이 운전대를 잡게 하는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무엇보다 국가경제의 장래를 위해 절실하다.

 

기업인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데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구성원들의 공유된 제도, 규범, 네트워크,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를 빌려 재계 지도층은 대오 각성하고 추락한 윤리 복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의 거친 개입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강화, 소수 주주권 강화, 노동이사제 도입 등 외부적인 강제와 규율이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흔들어댈 수 있다. 기업은 후계자 양성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더 나은 방안으로 전문경영인 중용을 통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벌가 자녀의 일탈 행동과 가정교육이 문제라는 말이 재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