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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돌아온 ‘올드보이’(Old Boy)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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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돌아온 ‘올드보이’(Old Boy) 전성시대
  • 최재혁 지방부 부국장 정선담당
  • 승인 2018.09.20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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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었다. 그녀가 강릉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가는 길에 동해바다에서 스캔들을 만든다. 절벽에 피어 있는 철쭉꽃을 보고 갖고 싶었다. 그런데 꽃을 따다 바친 장본인은 늠름한 남편이 아니라 시골의 한 노인이었다. 암소를 끌고 가던 이 ‘올드보이’는 아무도 꽃을 따다 비치는 사람이 없자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으로 올라가 꽃을 꺾어 바친다.
 
- 붉은 바위 끝에/ 암소 잡은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意譯) -
 
노인은 향가를 잘 부르는 멋쟁이였다. 그의 아리아에 수로부인은 마음이 빼앗겼던 것은 아닐까. 수로부인이 용왕에게 끌려 며칠 후에 돌아왔다는 설화를 보면 외도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신라인들은 절세미인과 올드보이의 꽃에 얽힌 로맨스를 이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런 로맨스에 반해 전통 유교사회 이면에는 노인홀대 사례도 만연했던 모양이다. 조선 선조 때 문신이었던 이승증(觀瀾 李承曾, 1515~1599)의 시 무제(無題)가 세태의 이면을 보여준다.
 
- 부잣집 자제가 가난한 집 자제를 비웃고/ 젊은이가 늙은이를 비웃는 세상/ 이런 추태를 없앴을 수 있다면/ 중국의 태평성대와 다를 바 없지 않으리요(富家子笑貧家子 綠髮人譏子白髮人 若使世情無此態 義皇天地葛天民/意譯) -

그래서 제왕들이 ‘기빈(耆賓)’이니 기로소(耆老所)를 만든 것인가. ‘기빈’은 중국에서 즐겨 쓴 용어로 노인을 귀한 손님처럼 예우한다는 뜻이며, 기로소는 임금이 특별히 나이 많은 관리들을 모아 격려하고 대접한 것이다.

중국의 부잣집이나 관청에는 ‘耆賓’이라는 현판을 걸고 노인 존경 풍속을 고취시켰다. 조선은 명절 때가 되면 노인들에게 주식을 하사하고 100세가 넘는 노인들은 궁중으로 불려가 임금이나 태자의 등에 업히는 영광을 누렸다.

나이 많다고 출사나 관리의 등용을 막는 법은 없었다. 백발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 말단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인과 사위가 한 날 한 시에 과거에 급제, 동과계(同科契)에 가입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셨다. 충청도의 한 선비는 평생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고희가 넘어서 합격한 후 그 이튿날 세상을 끝냈다고 한다.

미국의 전쟁 영웅인 고(故) 맥아더 장군이 즐겨 애송한 시 ‘청춘’은 사무얼 울만이 78세에 쓴 작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젊은이다운 패기와 열정이 있으면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 (전략)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중략)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 (하략) -
 
올드보이의 사전적 의미는 정정한 노인이나 원기 있는 중년 남자, 또는 남자 학교의 졸업생이나 교우를 뜻한다. 이 말은 2003년 국내에서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 ‘올드보이’로 인해 널리 회자되게 됐다. 정치권에서 올드보이라는 말은 ‘시대 변화에 맞지 않는’, ‘한물 가서 쓸모없는’ 정도의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실제 중진이나 원로 정치인들을 비꼬는 경우에 종종 사용된다.

지금 여의도 정치권은 올드보이 전성시대다. 최근 당선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를 비롯, 최근 선출되거나 추대된 주요 4당 대표들이나 비상대책위원장은 대부분 60~70대인 올드보이들이다. 손 대표가 71세로 가장 많고 이해찬 민주당 대표(66),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65),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64) 순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 당 대표와 총리, 대선 후보, 교육부총리를 각각 지내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노련한 정치인들이다.

최근 바른미래당 대표로 손학규(70) 상임고문이 선출되면서 대한민국 정치 1번지인 여의도에는 올드보이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해찬(66)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동영(65) 민주평화당 대표, 여기에다 김병준(64)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정치 노장’들이 잇따라 귀환했다.
 
올드보이들의 화려한 귀환에 대해 ‘세대교체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역량 있는 젊은 정치인들이 많은데도 아무도 정당의 대표들이 되지 못했다. 일부 역량 있는 젊은 정치인들은 아예 당 대표 선거에 나서지도 않았다. 국내 정당 문화가 여전히 젊은 정치인들에게는 문턱이 높기 때문이다. 젊은 정치인들이 이런 정치 토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더 배양해야 한다. 하지만 기성 정치권을 변화시키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정치권에선 ‘경륜 기반의 안정적인 당 운영’이라는 기대와 ‘정치 혁신 지연’이라는 우려의 시선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집권 2년차 각 당이 2020년 4월 총선과 나아가 대선까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여야 모두 ‘모험’보다 안정적인 카드를 선택했다. 이들 ‘올드보이’들은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서로 각자 다른 당을 이끄는 수장으로 만난만큼 안정적인 리더십 발휘로 당내 갈등 제어와 서로 타협의 공간을 만들 수 있어 협치 정치의 가능성이 기대돼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이들 모두가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들로 당 운영이 ‘자기 정치’로 흘러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지연시켰다는 비판도 극복해야 한다. ‘올드보이’들의 선전 뒤에 ‘젊은 리더십 부재’라는 한계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 특히 10년간 정치 상황과 국민들의 사회적 요구가 크게 달라졌는데 과거 대표급 정치인들의 귀환으로 인해 ‘정치 혁신’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 정기국회는 돌아온 ‘올드보이‘들이 이끄는 첫 정치 시험대다. 현재 실타래처럼 꼬인 정국을 풀고, 여소야대 다당제 하에 대화와 타협으로 정국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연륜과 경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각 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국민과 민생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면 ‘구 시대회귀’를 우려하는 국민 불안을 말끔히 씻어줘야 한다.
 
최근 각 당에서 원로정치인들의 재등장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젊은 정치인 사이에서 노치로 매도하고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에서 유행한 ‘올드보이’란 지칭이 원로 정치인들에게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정당들이 올드보이를 ‘당의 얼굴’로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각 당이 처한 위기를 경륜과 정치력으로 극복해 달라는 주문이다. 젊은 정치인들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귀환한 올드보이들은 대부분 뛰어난 정치력과 다양한 국정 경험, 높은 대중 인지도, 불굴의 도전 정신 등을 갖고 있다. 국민들은 올드보이들이 능력과 경륜을 발휘해 경제 및 안보 위기, 국론 분열 등 국가적 위기를 잘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올드보이가 희망을 주는 ‘골드보이’가 될지, 한때 ‘유행’으로 끝날지는 그들의 노력과 성과에 달렸다.

지금 한국의 정치, 정치인들은 본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이들의 산만한 폭주를 잡아 줄 경륜이 필요한 때는 아닌가. 헌화가 주인공처럼 용기 있고 열정 있는 노인들은 올드보이가 아니다. 경륜 있는 이들이 필요한 시기는 바로 지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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