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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의회 기고) 베드남 관광가이드의 감동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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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의회 기고) 베드남 관광가이드의 감동스토리
  • 승인 2017.02.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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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노원구의회 김승애 의원

 

 

-노원구의회 김승애 의원(사진 왼쪽) 과 베트남 가이드가 함께 기념촬영했다.

연초 베트남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베트남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편의상 베트남가이드를 ‘염부장’이라 지칭하겠다. 염부장은 당진 출신으로 꽤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음대에 입학해 음악가의 꿈을 키워갔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실패를 겪으며 겨우겨우 졸업, 당연히 해외유학은 꿈도 못 꾸는 상태였다.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고자 오디션을 봐도 해외파가 아니면 합격이 힘든 현실에 좌절하던 중, 그는 선배의 도움으로 베트남에 건너가게 됐다고 한다.

 

외로운 타국 생활이 시작됐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방황하던 염부장은 어느날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6살쯤 되는 아이를 만났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국말로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한 꼬마아이가 그를 부른 것이었다. 이에 다가가 말을 시켜보았는데 아이는 말은 잘 못했고 몸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따라간 곳은 아주 허름한 판자집이었다. 그 집에는 남루한 차림의 할머니가 계셨는데 할머니는 그에게 오래돼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할머니도 아이처럼 정상적인 대화는 어려웠지만 손짓 몸짓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월남전 당시 할머니는 한국남자와 사랑에 빠져 하노이에서 동거를 했다고 한다. 어느날 남자는 한국으로 떠나며 말했단다. 한국 재산을 정리한담에 돌아와 결혼하자고. 남자가 떠난 뒤 베트남은 휴전이 되었고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남자가 떠난 후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고 딸을 낳았다.

 

남자를 찾을 길은 없었다. 한국으로 떠나버린 남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할머니는 미혼모로 행상을 하며 때로는 구걸을 하면서 혼자 아이를 키웠다. 딸은 산속에서 문명의 혜택도 못 받고 학교도 못 다니며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비극은 끝이 없었다. 산중에 딸을 두고 돈 벌러 나간 사이 딸이 강간을 당하고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염부장을 이 집으로 이끌고 온 아이였다. 아이는 한국 사람만 보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른다고 한다. 할머니는 한국으로 간 그 남자를 찾아달라고 염부장에게 부탁했다. 딱한 사연이긴 한데 염부장은 본인도 살기가 어렵고 베트남에서 아직 적응도 못하고 있는 형편에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베트남에 관광 성수기가 됐다. 가이드가 부족해져서 염부장은 선배의 부탁으로 잠시만이라고 생각하고 가이드일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애처로운 부탁이 생각났다. 한국의 선배와 친구, 지인들을 동원해서 그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는데 이름이 같고 생년이 비슷한 사람 아홉의 명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얻은 전화번호도 보이스피싱으로 오해를 받아 욕설만 듣고 끊기기도 했다. 몇 달이 흘렀다. 할머니는 지쳐가고 있었고 아이엄마는 바보처럼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염부장은 다시 문자로 지인들에게 사연을 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인천에 있다는 할아버지와 연락이 닿게 됐다. 통화를 해 확인해보니 본인이 맞다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여권이며 할머니의 여행경비 마련 등을 보살펴주고 한국여행객에게 부탁해서 한국의 남자를 만나도록 부탁도 해두었다. 드디어 할머니는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그를 만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그 후 한참이 지나도록 할머니의 소식은 없었다.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들인 시간이 얼마며 전화요금은 또 얼마였고 욕은 얼마나 들었던가.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 궁금하기도 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가보니 할머니는 거의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한다. 공항에서 할아버지를 만났고 그 남자가 맞으나 그 후의 만남은 할머니의 오랜 기다림 속에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딸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가정이 있으니 한번 본 걸로 끝내자”라고 할머니에게 옷 한 벌 사주고 한국에 머무른 경비만 부담하고는 빈손으로 할머니를 보낸 것이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남편을 찾겠다는 희망으로 살아왔는데 그리도 무정한 만남을 갖고보니 하루하루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염부장도 아픈 가슴을 안고 돌아와 고민을 했다. 해가 바뀌고 가이드 업이 직업이 된 염부장이 가이드협회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가이드를 하면서 겪는 인상적인 스토리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어 할머니의 사연을 말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끼리 할머니를 돕자!”누군가 제안했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할머니의 생활비가 모아지고 지금은 할머니의 생활비와 손주의 교육비까지 지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 아이가 현재 11살이고 한국어도 잘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아이의 꿈은 유엔사무총장이 되어 지구의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다.

 

이일을 계기로 한국인가이드협회는 고아원과 고엽제 환자촌을 정기적으로 돕고 있다. 원한과 원망으로 끝날뻔 했던 3대의 비극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민간 외교사절단이 이보다 더 국위선양을 잘 할 순 없을 것이다. 타국에서 고생하면서도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가이드 여러분들께 감사와 찬사의 박수를 보내면서 늘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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