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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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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3.1절
  • 승인 2017.02.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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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호 정

 

3.1절에는 조기를 달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국기법등 관계 법령을 찾아보면

 

3.1절은 국경일이므로 조기를 달지 않는다. 3.1절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해 우리 국민이 전국적인 항거의 물결을 일으킨 날이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98년전의 그날, 우리 선조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3.1절에 조기를 달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픈 것이었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우리 국민들은 결국 10여년 간의 한을 토해내며 1919년 3월 1일 맨손으로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고종황체의 독살,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결정적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이루어진 조선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에 고무된 국내 지도층들과 학생들이 그간의 분노와 독립의 희망을 한데 모아 3월 1일에 분출한 것이다.

 

처음에는 학생과 종교인이 중심이었던 3.1만세운동은 점차 농촌 등 전국으로 퍼져나가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대응은 잔혹하고 악독했다. 일제는 독립의 염원을 맨몸으로 부르짖는 민중을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살육했고 연행된 사람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심지어 제암리 학살사건처럼 성인남자들을 모조리 가둬놓고 불을 질러 학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통계에 따르면 3.1만세운동당시 사망한 사람만 7,509명, 부상자가 15,850명, 체포된 사람이 45,306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한 사람은 200여만명이 넘었고 전국 213개 군 중 203개 군에서 총 1,542회에 이르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가 2000만명 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10%가 목숨을 걸고 거국적 독립운동에 참가한 역사적으로도 전무 후무한 기록인 것이다.

 

일제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대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뜨거운 나라사랑 정신으로 맞선 3.1운동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민국의 힘이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3.1절은 슬프고 비통한 날이 아니다. 독립의 염원을 세상에 부르짖은 용기 있는 민중들을 기념하는 자랑스러운 날로 기억하자. 3.1절은 폭력과 폭압으로는 대한민국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후세와 전세계에 알린 뜻깊은 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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