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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판문점으로 보는 정전협정과 유엔군 참전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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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보훈지청 기고) 판문점으로 보는 정전협정과 유엔군 참전의 의의
  • 승인 2018.07.1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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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과 김정애 주무관

 

 

 

 

 

임진년(1592), 선조가 몽진을 떠나 의주로 향하던 길. 빗바람과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선조 일행이 강 앞에 멈췄다.

 

 

나룻배 하나 없는 임진강이었다. 백성들은 대문을 뜯어내 널빤지를 이어 다리를 놓았다. 왕의 존재 유무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던 때, 널빤지 다리로 강을 건너 왜구의 추격을 피했다. 그 날 이후, 파주에 이 작은 마을은 ‘널문리 마을’이라 불렸다. 널빤지로 다리를 만든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판문점이 된 널문리 마을. 1953년 7월 27일 오전10시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그곳, 판문점에 모였다. 예비회담은 당초 개성에서 열렸으나, 북한측의 제안을 유엔군이 수용하면서 널문리 마을로 옮겨졌다. 판문점은 널문리를 중국식 한자로 바꾼 것이다. 2년이 넘는 교착상태에서 어렵게 성사된 정전협정식은 시작된지 불과 11분만에 끝이났다.

 

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전투행위는 중지되었고, 남북한 사이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한국전 정전협정은 협정 당일 22시에 발효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국제법상 65년이라는 가장 긴 효력을 가진 정전협정이 되었다.

 

정전협정일인 7.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이기도 하다. 세계2차 대전의 발발로 국제연맹이 해체되자, 국제연합이 출범하였다. 국제연합은 안전 보장 이사회를 통한 강제력, 유엔군의 의한 제재 및 집단안보를 강조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북한의 무력공격을 ‘평화에 대한 위반’이라 규정했다. 7월 7일 최초의 유엔 통합사령부를 구성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채택하고, 24일 ‘유엔군 사령부’를 창설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등 16개국 전투지원국과 노르웨이, 인도 등 5개국 의료지원국이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21개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유엔기 아래 모였다.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341,227명이 전투에 참가하여, 그중 57,933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한국은 당시 유엔 가입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단행동의 첫사례가 되었지만, 오늘날 집단안보의 시금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엔군 참전은 유엔의 ‘평화’라는 존립목적을 국제사회에 명확히 보여줬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희생된 유엔군을 추모함과 동시에 평화로 답하는 책무를 가지는 이유다.

 

널빤지처럼 나무상자도 다리가 될 수 있을까. 전세계의 언론이 다시 판문점을 조명하고 있다. 판문점 유엔사 구역에는 미군 유해송환을 위한 나무상자 100개가 놓여있다. 지난 15일 유엔사와 북한 판문점 대표부간 장성급 회담과 16일 실무회담이 열리며 미군 유해송환이 평화협정으로 가는 이정표로 기대되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간디의 말처럼, 정전의 강을 건널 평화의 다리가 판문점에서 놓여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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