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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깍듯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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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깍듯할 필요는 없다
  • 윤치영 저술가
  • 승인 2019.02.20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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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라는 건 최소한의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의는 최소한의 약속된 프로토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프로토콜에 형식적인 허례허식이 자꾸 덧붙여진다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형식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엔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불필요한 절차만 증가될 것이다.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게 예의란 건데 오히려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셈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무조건 친절한 게 예의가 아니다. 친절엔 강도가 있고, 해야 될 만큼인 사람이 있고, 요런걸 분별을 우리가 해야 되는 거다. 예의만 딱 갖춘 사람한테는 왠지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적당히 안기는 듯한 가벼운 태도나 응대가 오히려 친근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형호제하기를 좋아한다. 형식이나 예의에 읽매이다 보면 관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는 말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감을 잃지 않는다면 때론 디스도 관계에 활력을 줄 수 있다. 디스를 당할 때 화를 내거나 반격하기 보다는 맞-디스로 상대방을 응수 하는 것도 좋다.

 

남자나 여자나 너무 완벽해 버리면 다가서기가 어렵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일을 거의 완벽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빈틈없이 일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있다. 그런데 그런 여성이나 남성은 뇌의 구조상, 성격상 사랑을 하는데 적당치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의 행위는 부교감 신경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경쟁하고, 완벽한 것은 교감신경의 역할이다.

 

부교감신경은 기도할 때, 슬픈 영화를 보고 울고 났을 때, 한 여름에 낮잠을 자고 났을 때 필요한 것이다. 기분 좋고 행복한 느낌,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느긋한 느낌이 부교감신경이다. 그런데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 느긋해질 수 있을까. 파트너의 완벽하지 않은 행동을 이해하거나 내 버려둘 수 있을까?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는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 부른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 부른다. 완벽한 것보다 하나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때로 필요하다는 교훈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완벽한 사람보다 어딘가에 부족한 듯이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느낀다. 너무 완벽하면 들어갈 틈도 없고, 마음과 몸이 쉴 공간도 없어 보인다. 제주도의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돌담에 있는 돌과 돌의 사이를 일부러 메우지 않았는데 그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세찬 바람에 돌담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남자나 여자가 숨을 쉴 수 있는 빈틈이 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물리적 틈새가 아닌 정신적 틈새가 존재할 때에 남녀관계가 유지가 된다. 내 마음에 빈틈을 내고 남자의 빈틈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의 고난에도, 어떤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남녀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만약에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따질 것을 다 따지고, 오래전에 있었던 일까지 계속 곱씹으면 남자는 숨이 막혀서 사랑하는 감정이 죽고 말 것이다. 빈틈을 주고, 좀 부족한 듯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남자를 살리는 비결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느긋함을 위한, 부교감 신경을 살려내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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