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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38] 문화유산이 된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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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38] 문화유산이 된 ‘목포의 눈물’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6.08.0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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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일제강점기시절에는 조국을 잃은 울분을 달래고, 한 때는 지역차별의 한을 달래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 대중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목포의 눈물’이다.
원래 가사의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다.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주최한 ‘향토 신민요 노랫말 공모전’에서 탄생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던 목포 출신 문일석이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 1등에 당선 됐다.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여기에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 명곡의 탄생 순간이다.
하지만 2절의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라는 가삿말이 문제가 돼 수난도 겪었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섬멸, 수장시킨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고 ‘임그려 우는 마음’은 이순신 장군을 그리워하는 백성을 의미한다는 이유였다.
가수는 목포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십대 후반의 이난영이었다. 노래를 부른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동의 한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이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제주도로 식모살이하러 떠난 어머니를 따라 가며 학교를 중퇴했다.
다시 목포로 돌아 온 난영은 오빠가 운영하던 조그마한 악기점을 드나들며 노래에 흥미를 느꼈다. 마침 태양극단이 목포에 순회공연을 왔을 때 어머니와 오빠의 권유로 막간 무대에 설수 있었다. 막간 무대의 노래 솜씨를 인정받아 극단에 입단하게 됐다.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극단장 박승희가 ‘난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가수 ‘이난영’은 이렇게 태어났다.
‘목포의 눈물’은 1936년 일본에서도 음반이 발매돼 적잖은 사랑을 받았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대히트 이후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목포의 추억’ 등 목포와 관련한 노래를 16곡이나 취입했다. ‘목포는 항구다’는 난영의 친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했다.
이난영은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으로 당시의 국민정서를 고스란히 ‘목포의 눈물’에 담아냈다. ‘목포의 눈물’은 노랫말과 곡조가 애잔한데다 나라를 잃은 깊은 한과 울분을 담고 있어 ‘목포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한 때는 ‘비내리는 호남선’과 함께 호남의 한을 대변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때 호남지역을 연고로 했던 해태타이거즈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응원가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 노래를 기념하기 위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1969년 목포 유달산 중턱, 삼학도가 마주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다. 예총 목포지부가 주관하여 세운 것으로 오석에 노래가사 등이 새겨져 있다.
올해는 이난영이 태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목포시가 마침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시절에는 조국을 잃은 울분을 달래고, 한 때는 지역차별의 한을 달래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한동안 대중문화를 저급하다며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심지어는 같은 대중문화이면서도 외국의 팝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대주의적 사고도 있었다. 마치 조선시대 사농공상처럼 ‘딴따라’라며 천히 여기는 것을 당연시 했다.
하지만 ‘한류’로 표현되는 대중문화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전세계에 가장 잘 알리는 ‘명예의 수단’이 되고 있다.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목포시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문화유산 등재는 그런 의미에서 전향적인 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목포에는 이난영의 뒤를 이어 ‘남진’이라는 대중가요의 거목이 또 생존해 있다. 이난영이 애조어린 여성성의 목소리로 가슴을 울린다면 남진은 굵고 힘찬 남성성의 목소리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생존한 예술인에 대한 문제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목포의 눈물 노래비’의 문화유산 등재와 별도로 차제에 남진의 노래비도 검토해볼 만하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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