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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42] 그대,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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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42] 그대,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나 있는가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6.10.19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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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인생이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들이었지만 그 표현이 주는 느낌은 충분히 잔을 들게 했고 술잔은 탁자 위에서 울다 끝내 쓰러지곤 했다.-

1956년 3월 하순의 어느 초저녁,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시인 박인환은 종이에 무엇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어지러이 남아있던 서울 명동 뒷골목의 목로주점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하루 전 박인환은 10년 전 타계한 첫사랑 여인의 기일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녀 온 길이었다. ‘그 사람’을 그리며 박인환이 쓴 시에 작곡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여 성악가 임만섭이 열창했다. 노래는 금세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훗날 박인희가 리바이블하여 크게 히트시킨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순간이다.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그리워하고, 잊혀지지 않는 이름을 부르던 박인환은 그로부터 1주일 뒤 잊을 수 없어 ‘잊었다’던 그 사람 곁으로 갔다. 유족의 양해아래 망우리 공동묘지 옛 연인의 묘 옆에 묻혔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는 이제 어쩌면 더 이상 애절한 시는 쓰지 않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세월이 가면’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목마와 숙녀’와 함께 세월을 멈춘 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특히 가을이면 사람들은 가슴속에 부는 소슬바람과 함께 박인환을 앓곤 한다.

1970년대 말 광주시 충장로에는 ‘목마와 숙녀’라는 술집이 있었다. 막걸리를 파는 목로주점은 아니었으나 청춘들이 피어내는 고뇌로 가득했다. 명동의 목로주점에 전후의 상흔이 가득했다면 ‘목마와 숙녀’에는 유신정권의 끝 모를 불안이 가득했었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이 집에서는 매시 정각이 되면 박인희가 낭독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괘종시계 알람처럼 흘려보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로 시작되는 박인희의 애잔한 목소리는 청춘들의 ‘귓전에 철렁’거렸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라고 맺어지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

인생이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들이었지만 그 표현이 주는 느낌은 충분히 잔을 들게 했고 술잔은 탁자 위에서 울다 끝내 쓰러지곤 했다.

유신정권이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나는 목마처럼 방울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 시국을 얘기하지 않으면 지성이 아닌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박인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매시 정작엔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 가을 바람소리’를 듣곤 했다.

가을이다. 짧아서 더 아름다운 계절이다. 우리네 삶도 가을만큼이나 찰라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다.

계절의 서늘함에 노랠 불러 본 적이 없어도 가수가 되고, 시를 써 본 적이 없어도 시인이 되는가 하면 밤하늘의 별을 쳐다 본 적이 없어도 철학자가 되게 하는 계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노와 울분뿐인 그 황량한 시절에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질풍노도의 길에 심어진 작은 쉼표였다.

계절은 무엇을 향한 질풍노도인가 물으며 때로는 작은 쉼표에 걸터앉아 내려놓은 법을 배우라고 한다. 얻으려면 먼저 버리라고 낙엽은 발밑에서 속삭인다.

켜켜이 쌓인 간절함을 꺼내 햇살에 말리고 바람에 실려 보내도 어색하지 않을, 간절함이 수채화로 그려질 그런 계절이다.

이 계절에 감춰두었던 소중한 이름 하나 꺼내 가만히 불러 볼 일이다. 가슴속의 그 이름 꺼내어 ‘사랑 한다’고 혼잣말이라도 해 볼 일이다. 생전에 ‘사랑 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부모님을 그려봐도 좋고, 젊은 시절 청춘의 홍역이었던 이름이면 또 어떤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사랑 한다’고 말하자. 이 나이에 아직도 가을을 타는 내가 고맙지 않는가 말이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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