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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50] 공인을 모욕할 수 있는 권한과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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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50] 공인을 모욕할 수 있는 권한과 표현의 자유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7.02.01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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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 박근혜 대통령의 누드를 패러디하듯 노무현 대통령의 더 은밀한 곳도 패러디 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나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작품을 보고 좋아서 박수를 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분노로 치를 떨 수도 있다. 그 것이 자유로운 사회다.-

 

1983년 미국의 외설잡지 ‘허슬러’에 맥주 광고가 실렸다. 유명 복음 전도사이자 기독교 원리주의자인 제리 폴웰 목사가 만취하여 화장실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첫경험’을 했다는 내용이다.

폴웰 목사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린 광고는 지면에 인용하기도 힘들만큼 역겹고 혐오스러운 내용으로 가득했다. 폴웰 목사가 ‘허슬러’를 비난한데 따른 공격이었다.

‘허슬러 대 폴웰 사건’으로 불리는 이 광고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허슬러’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했고 최종심인 연방 대법원에서도 허슬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 시민의 특권중 하나는 공적인 인물이나 정책을 비판할 권리다. 공인에 대한 패러디가 아무리 혐오스럽다 할지라도 공인을 패러디 할 수 있는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이다. 공인에 대해 모욕할 수 있는 권한이 시민권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임을 법원이 증명해 보인 셈이다. 당시 연방 대법원장은 보주주의자로 유명했던 월리엄 렌퀴스트였다.

얼마 전 국회에 프랑스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더러운 잠’이 전시돼 파란이 일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뒤에 두고 나체로 잠을 자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런 대통령의 머리를 최순실과 김기춘 전비서실장이 조종하는 내용이다.

새누리당과 바른 정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발칵 뒤집혔다. 보수주의자들은 ‘탄핵정국’을 물타기 하기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았다. ‘여성혐오’, ‘성적 수치심’, ‘관음증’, ‘인간의 존엄’ 등의 온갖 부정적 단어가 총알처럼 쏟아졌다. 군대 시절 장군 계급장을 달았었다는 한 보수단체 회원에 의해 그림은 파괴됐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극우보수 집단의 반응이야 그렇다고 치자.

정작 의외의 쇼는 민주당에서 나왔다. 전시회를 주최한 자당의 표창원 의원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하고 표의원은 또 죄인이 되어 사죄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릴까’ 싶어 서둘러 사건을 덮으려고만 했다. 나아가 민주당 우상호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표현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느냐’며 역시사지의 대인배 흉내를 냈다.

정치권의 셈법에 따라 ‘불의한 권력에 대한 풍자’라는 사건의 본질은 실종되고 말았다. 본질은 여성대통령의 나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민낯이다. 300명이 넘는 국민들이, 그것도 우리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 빠져들고 있을 때 머리를 매 만지며 여성의 삶을 추구했던, 그러면서도 ‘내가 뭘 잘못했냐’는 오만한 권력에 대한 풍자는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박 대통령의 나체뿐이었다. 저급하고 단순한 한국정치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한 편의 블랙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한다고 하여 새누리당과 바른 정당은 탄핵정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민주당은 누워서 떡 먹듯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더러운 잠’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누드를 패러디하듯 노무현 대통령의 더 은밀한 곳도 패러디 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나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작품을 보고 좋아서 박수를 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분노로 치를 떨 수도 있다. 그 것이 자유로운 사회이고 그런 갈등을 조화시키는 것이 정치다.

이번 ‘더러운 잠’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은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거나 또는 그리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했고 ‘좀 더 세련될 수는 없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저급한 대응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스스로 평가했을 일을 정치권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앞장서서 표현의 자유를 짓밟고 말았다. 부끄러운 대통령과 부끄러운 정치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로 인해 국민들이 부끄럽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러한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200년 전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가 했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의는 우리에게 아직도 멀기만 하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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