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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91] 상사화 흐드러진 날, 불갑사에 가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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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91] 상사화 흐드러진 날, 불갑사에 가야 할 이유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8.09.12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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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남도에는 피울음같이 피어나는 상사화(꽃무릇)가 절정이다. 상사화의 울음소리는 불갑사가 있는 영광 불갑산이 뭐니 뭐니 해도 제격이다. 붉다 못해 시리다.

 

이제 그만 에어컨을 꺼도 무방하다. 잠자리에 들 때는 열어 두었던 창문마저 닫아야 한다. 백년 만에 찾아 온 폭염 뒤끝이어서 일까. 서늘한 가을 날씨가 반가움을 넘어서 충만한 기쁨이 되는 요즘이다. 자연이 주는 미소는 짧다. 머릿결을 만지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 날도 멀지 않으니 서두른 것도 괜찮다.

이런 날엔 ‘닥치고 나가는 게 상책’이다. 쉬는 날 하루 쯤 내려 논다고 하여 대수겠는가. 툴툴 털고 나서는 게 내일이 더 힘차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내일을 잊어도 된다.
 
그래서 칼럼도 하루 쯤 나라일은 집어 치우기로 했다. ‘일자리 쇼크 집값 폭등’, ‘민생비명 외면하는 정부’, ‘평양훈풍 지지율은 무풍’, '靑 무리한 초대  문희상도 거절', ‘문 대통령 지지율 넉 달 새 34% 증발’ 등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에 대한 각 언론들의 보도내용 제목들의 활자가 돋보기로 보듯 어지럽다.

그러나 '소득주도 성장은 그대로 간다'며 조금 더 참고 지켜보라지 않는가. 대통령이 전임자들처럼 몸치장으로 국정을 외면하는 것도, 개인치부에 열중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더구나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만난다는 소식도 있으니 세상사 잠시 잊고 나들이의 기쁨으로 채워보자.
 
남도에는 벌써 꽃바람이 한창이다. 그 중에서도 피울음같이 피어나는 상사화(꽃무릇)가 절정이다. 상사화의 울음소리는 불갑사가 있는 영광 불갑산이 뭐니 뭐니 해도 제격이다. 붉다 못해 시리다.

오늘부터 7일간 '영광 불갑산상사화축제'가 열린다. 꽃말 정도는 알고 가자.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상사화의 꽃말이다. 문자를 쓰자면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想思草)'다. 한 뿌리에서 나오지만 ‘꽃이 필 때는 입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다’ 는 애틋함이 서려 있다. 봄이 지나 잎이 사그라지면 꽃대가 올라와 붉은 꽃을 피우고, 꽃대와 꽃이 시들면 또 잎이 나와 꽃을 그리는 상사화는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붉게 타들어가기만 했던 젊은 날의 우리네 청춘 같기만 하다.

불갑사에 그런 설화가 하나 전해오고 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스님과 공주의 사랑이다. 신라시대 불갑사의 경운이라는 법명을 가진 한 젊은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갔다가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몰래한 사랑은 들키기 마련이고 왕은 스님을 신라로 추방한다. 공주는 이승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내세의 인연을 기약하며 증표로 참식나무 열매 몇 알을 스님의 바랑에 넣어 준다. 돌아보면 참식나무 아래서 키운 사랑이었다.

스님은 귀국하자마자 불갑사 뒷산의 양지바른 곳에 참식나무 열매를 묻고 싹을 틔워 정성으로 키웠다. 그리고 스님은 공주와 이승에서의 사랑의 연(緣)을 참식나무로 승화시키고, 다시 부처님의 제자로 조용히 되돌아갔다.
 
인도 공주와 스님의 사연을 안고 있는 침삭나무는 지금도 불갑사 뒷산에 남아 천연기념물 11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암수가 다른 참식나무의 사시사철 푸른 잎사귀는 변치 않은 사랑을 상징하고, 새털보다 더 보드라운 새잎은 공주의 섬섬옥수의 상징이다.

상사화와 참식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짓눌렸던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푸르러지게 됨을 볼 것이다.
 
상사화 흐드러지던 날, 불갑사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노래하는 스님이다. 무상(無相) 스님이다. 클래식 반열에 오를만한 오래된 명곡의 팝과 가요를 번갈아 가면서 부르는데 가던 길이 자석에 이끌리듯 저절로 끌려가 멈춘다.
 
수염을 길렀으면 임꺽정보다 더 힘센 장사였을 듯한 풍모에서 어떻게 그런 맑고 힘차고 애절한 미성이 나올 수 있는지. 상사화의 붉은 빛이 스님의 노래소리에 장단 맞춰 더욱 붉어지는데 어찌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는가.
 
기운이 남으면 불갑산을 올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고, 아니면 불갑산 고개 너머 함평의 용천사를 찾는 것도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상사화는 불갑산을 넘어 용천사에서도 한세상 이뤄 흐드러진다.
 
어디 이 계절에 상사화뿐이겠는가. 정읍 구절초 테마파크에서는 온갖 구절초가 피어나 진한 향기로 채워지고, 머잖아 순천만의 갈대는 은빛으로 빛날 테다.
 
하루쯤은 복잡한 세상사 잠시 잊고 쉼표에 걸쳐 앉아 감성으로 채워보자. 세상은 그 만한 가치가 있고 또 아름다우니.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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