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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에서] 구구소한도 속에 봄은 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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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에서] 구구소한도 속에 봄은 와 있고?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20.02.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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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정선담당

요즘 사찰에 출가하는 사람이 없다. 출가하는 이가 있다면 매우 환영을 받을 것이다. 출가해서 수행하는 예비 승려를 행자라고 하는데 이들이 격감했다. 그 이유가 뭘까? 얼마 전 출가를 망설였던 한 여자분은 “여자 승려인 비구니스님들이 차별당하는 것을 보고는 출가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남자들도 줄어들고 있으니 다른 이유도 있을 듯싶다. 차를 마시면서 편안해지는 것이 좋아서 스스로 호를 지은 다음(茶) 김창덕 작가는 심심해야 출가를 할 텐데 요즘 세상이 전혀 심심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지하철을 타거나 길가를 걸어도 모두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를 않는다. 그런 젊은이들은 사찰의 그 ‘느낌’을 잘 모를 것이다. 굳이 여행을 떠나려고도 하지 않고 한가하게 쉬려고도 하지 않을 정도로 요즘 우리는 전혀 심심하지 않다. 이런 데 굳이 출가를 하겠냐며 웃는다. 

현재 사용하는 우나라 지폐 가운데 가장 큰돈은 오만원권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 지폐의 앞면에는 신사임당과 그녀가 그린 묵포도도(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조선 중기 대표적인 문인화인 설곡(雪谷) 어몽용(魚夢龍)의 매화 그림 ‘묵매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이정(李霆)의 풍죽도(간송미술관 소장)가 담겼다.

묵매도에는 최소한 52개 이상의 매화가 그려져 있다. 천원권에도 성균관 대사성 역임한 퇴계 이황 선생과 명륜당,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다. 인품을 상징하는 매화와 관련해서 퇴계 선생은 69세 임종하면서 아들에게 “매화에 물주거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48세 단양군수에 부임한 퇴계 선생은 시·서·가야금에 능한 관기 두향(杜香 당시 18세)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몇 년 후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자 두향은 퇴계의 고매한 인품을 상징하는 백매와 두 사람 사이의 정을 상징하는 홍매 한 그루씩을 선물했다.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퇴계의 부음을 접한 두향이 4일 밤낮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고 이후 얼마 안 가 39세의 나이에 남한강에 투신한 것은 당시 대단한 러브스토리였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스토리나 화폐에 새겨져 있는 매화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매일 돈을 주고받으면서 매화향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다음 작가는 전한다.

다음은 음악과 춤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클럽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린다. 다음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영산재 보유자인 정지광 스님으로부터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와 불교 무용인 범무(梵舞)를 전수받았다. 영산재는 석가부처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이다.

죽은 영가를 발심시켜서 불교에 귀의하게 해 극락왕생시키는 불교의식이다. 이 가운데 불법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진 스님의 바라춤은 세상의 축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물 반주에 맞춰서 추는 춤이다. 그 바라춤에 능통한 그는 양손에 바라를 잡고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내면서 빠른 동작으로 앞으로 뒤로 회전하며 춤사위를 펼친다. 테크노 음악에 바라춤을 맞춘 ‘테크노바라댄스’는 그가 만들고 어쩌면 그만 가능한 새로운 춤의 장르다.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에 의해 창제된 밀랍화인 윤회매는 차 마시는 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이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 그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그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윤회와 같다는 의미에서 윤회매(輪廻梅)라 이름 붙여졌다. 허균 선생 말처럼 “나이 먹어 한가함은 진정한 한가함이 아니다”면서 젊었을 때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과 여유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는 몇 년 타면 바꿔 타거나 폐차하기도 하지만 운전자는 바뀌지 않듯이, 우리 몸은 생로병사 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마음공부가 매우 중요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낮의 시간이 밤보다 길어지는 동짓날 지난 사흘부터 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81개의 매화를 밑그림으로 그려둔다. 매일 한 송이씩 홍매로 채색해 나가고 그림이 다 끝나는 날 창을 열면 달빛 환한 밤에 매화가 피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봄을 기다리며 한가함을 즐겼다. 상상해보면 매화 가지에 달과 구름이 걸려 있는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는 참 여유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제각각이나 운치 있고 멋스러운 조상들의 풍류가 느껴지는 봄을 기다리는 놀이가 있었으니 동지 이튿날부터 시작되는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그리기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그림자놀이 역시 봄을 기다리며 그런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이들의 품격 있는 한가로움의 미학이다. 조명을 이용해 윤회매에 달린 달을 집채만 하게 만들기도 하고 물을 흘려서 시간을 표시하는 그런 풍류를 재현하는 그는 영원한 봄을 만든 삶의 진정한 수행자이다.

구구소한도는 꼭 그림으로만 그린 것은 아니라 문자로도 그린다. ‘정전수유진중대춘풍(亭前垂柳珍重待春風)’은 각 9획의 글자 9개로 되어있다. 매일 글자를 한 획씩만 그리면 한 자를 그리는데 9일이 지나간다. 또 다른 구구소한도는 아홉 개의 네모 칸이 있고 네모 칸의 하나하나에는 각각 아홉 송이의 매화가 그려져 있다. 흐린 날은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에는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하면서 81일 동안 날씨가 기록돼 영농 자료로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봄은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 없이 저절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데, 손가락 꼽으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가 보다. 벌써 도심 공원 목련꽃 봉오리가 ‘뭉클’하면서 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달력도 지난 4일이 입춘이라고 따스한 미소를 보낸다. 세상은 시끄럽고 하루하루가 어려운데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또 봄은 찾아온다. 봄의 전령사라고 하는 복수초는 피었고, 곧 산수유 등 다른 봄꽃들도 만발할 것이다.

붓을 들어 지금부터라도 ‘구구소한도’를 그려볼까. 서민들 ‘생활 기상도’에는 하루라도 맑은 날이 있을까 싶다. ‘정치 기상도’를 살펴봐도 매화 아래쪽에 색칠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 같다. 정치권은 여전히 제 살길만 찾고 있고, 경기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서민 속도 모르고 꽃망울 펑펑 터뜨릴 거 생각하니 야속하기만 하다. 구구소한도에 마침표를 찍는 4월 그때쯤이면 웃음꽃 활짝 핀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선조들의 로맨틱한 여유로움과 기다림의 미학이 느껴지는 구구소한도를 통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못 혼란스러운 요즘 상황에 정중동의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고려 말에 목은 이색 선생은 왕조의 황혼을 이렇게 한탄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우리도 이 모진 겨울을 이기고 매화를 만날 수 있을까.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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