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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醒菴 선생, 조화로운 논쟁으로 '국론 통합의 길'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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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醒菴 선생, 조화로운 논쟁으로 '국론 통합의 길' 모색
  • 충남취재본부/ 한상규기자
  • 승인 2014.04.1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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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醒菴) 선생의 호락논쟁의 통합론에 대해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 호락논쟁은 조선 후기 기호(畿湖) 유학계에서 벌어진 심성 논쟁으로서 그 쟁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사람의 본성과 다른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점이며 둘째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성리학의 기본 전제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그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이(理)는 같다’고 말하고 또 ‘그 이(理)가 만물에 부여되어 각자의 본성이 된다’고 설명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과 다른 동물의 차이를 잘 알고 있으나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기(氣)와 연관된 문제를 연상하게 된다. 요컨대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보편성을 설명할 때에는 이를 주목하고 만물의 특수성을 설명할 때에는 기를 주목하게 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본성을 논할 때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두 차원에서 접근하게 됐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의 같고 다름을 논할 때, 우리는 ‘만물이 모두 같은 본성’, ‘사람은 사람끼리 같고 호랑이는 호랑이끼리 같은 본성’, ‘사람마다 다르고 호랑이마다 다른 본성’을 생각할 수 있다. 성암의 성삼양설(性三樣說)은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만물의 본성을 세 차원으로 분석한 선구자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선생이다. 그런데 성암의 성삼양설은 남당의 성삼층설(性三層說)과 논리적 구조가 다르다. 만물이 타고난 본성 자체를 말할 때엔 ‘본연지성’이라 하고, 기에 따라 조금씩 특성을 달리 하는 본성을 ‘기질지성’이라 한다. 따라서 같은 맥락의 성리학에서는 만물의 본연지성은 모두 선하고, 기질지성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다고 본다. 그러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본래 하나라 하더라도, 이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호락논쟁의 핵심 쟁점이었던 것이다. 전문적인 용어를 피하고 상식적인 용어로 쉽게 설명하자면, 이는 양심과 욕심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서 우리는 흔히 모든 사람이 양심과 욕심을 함께 지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양심과 욕심은 본래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음은 사람의 자아(自我)를 뜻하는 바, 양심과 욕심이 본래 둘이라고 하면, 이는 ‘자아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심과 욕심은 본래 하나일 뿐이라고만 한다면, 이는 양심과 욕심이 항상 섞여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순선의 가능근거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 해도 때때로 순수한 양심을 발휘하는 것은 분명하다. 호론은 ‘양심과 욕심은 하나의 마음으로서 항상 같이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이에 대해 낙론에서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나 양웅의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과 같다고 비판했다.  낙론은 ‘양심과 욕심은 두 개의 마음으로서, 서로 번갈아가며 작용한다’고 보았는데, 이에 대해 호론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두 개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성암은 ‘양심과 욕심은 한 마음의 두 양상으로서, 기의 맑고 흐림에 따라 그 양상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성암의 동위이시론(同位異時論)이다.  성암의 성삼양설은 동위이시론에 입각한 것이며, 남당의 성삼층설은 동위동시론에 입각한 것이다.  성암의 성삼양설은 호론과 낙론의 이론적 문제점을 보완한 것으로서, 한국 성리학사의 기념비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사상강설을 통해 본 성암선생의 사상과 그 의미

▲정성희(성균관대학교 교수) 성암 이철영 선생은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식민지 초기까지의 격동기를 살다간 선비였다.  선생은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조선 왕조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시대에 대한 책무를 다하고자 누구보다 노력한 선비다. 성암 선생은 세거지인 충남의 공주와 부여 등의 지역에서는 항일 애국지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선생이 일본 식민 정부의 철도 부설 등 각종 식민정책에 항의하고, 호적 작성에 반대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해 여러 차례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항일행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선생의 학문이다. 항일운동을 포함한 선생의 행적은 철저하게 도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성리론은 문집인 성암집의 한 부분인 사상강설에 잘 나타나있다.  사상강설에는 조선왕조 후반기 200여 년간 계속된 호락논쟁(인물성동이논쟁)에서 드러난 호학과 낙학 간의 시각차를 극복하고 통합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선생은 호락논쟁의 주요 문제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호학과 낙학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차이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선생이 호학과 낙학을 통합하고자 창안해낸 이론이 바로 동위이시론(同位異時論)과 성삼양설(性三樣說)이다.  이는 양자의 논리적 불합리성을 지양하고 외암의 미발론과 남당의 성삼층설을 참고해 창안한 이론이다. 선생의 이 이론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논리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호학과 낙학의 통합 가능성을 보여준다. 선생의 학설은 율곡선생의 성리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선생은 호학과 낙학 역시 모두 율곡선생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근본적 논리와 학문의 목적은 같다고 보았다.  선생은 이렇게 율곡의 학설을 종지로 삼아 호락논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당시 일부의 성리학자들에게서 일어난 새로운 성리론에 대해서도 율곡의 학설을 근거로 하여 비판하고 반박한다.  매산 홍직필의 명덕심론, 간재 전우의 명덕주심론과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의 주리론이 그것이다. 선생이 사상강설에서 보여준 호락논쟁의 극복과 통합을 위한 치열한 학문적 노력에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학계의 분열상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선생이 살았던 당시는 사상초유의 민족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때였다. 이러한 때 호락논쟁이 마무리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학설의 등장은 선생에게는 새로운 학문적 위기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성암 선생의 학문은 율곡의 학설을 종지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되풀이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선생은 율곡의 학설을 추종하면서도 호락 양자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통합론을 창안해 내 양자가 충분히 통합 가능함을 보여줬다. 선생이 현실을 외면한 채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은거지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분열을 겪어오고 있던 학계를 통합하고 극복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했고 또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조선의 도학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 항일지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선생의 학문적 성과에 실천적 의미를 부여해주기에 충분하다. 성암의 학문적 성과는 도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던 조선이 없어졌으니 현실적으로 효용성을 발휘할 수는 없었지만 학문적으로는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말기부터 일부 도학자들에게서 시도되던 학계의 분열상에 대한 반성과 통합을 위한 노력이 조선 왕조가 없어지고 나서야 성암 이철영이라는 초야의 학자에 의해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기호(畿湖) 유학사(儒學史)에서의 성암의 위상은 어떤 것인가

▲이상익(부산교육대학 교수) 성리학(性理學)은 조선시대 정교(政敎)의 중심 이념이었다. 먼저 성리학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주자(朱子)는 당시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흔히 ‘올바른 학문이 올바른 정치를 낳고, 올바른 정치가 올바른 역사를 만든다’고 하는데, 주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새 시대의 원동력으로 새로운 학문을 모색했던 것이다.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세계의 본질을 이해했고, 심(心)과 성(性)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했다.  이기와 심성에 대한 탐구는 올바른 가치관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 가치관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업을 말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시대 전기에는 각종 문물을 정비하고 민생을 풍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통일성을 유지하던 유학자 집단도 중기 이후로는 다양하게 분기되면서 분파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호 유학’이란 ‘영남 유학’과 대립되는 용어다.  기호 유학은 율곡 이이(李珥)를 종사로 삼고, 영남 유학은 퇴계 이황(李滉)을 종사로 삼았다.  기호 유학은 이기심성론에 대해 퇴계학파와 견해를 달리 하면서 학술적으로 대립하는 형국이 돼 예학(禮學)에서도 영남학파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밖에 여러 구체적인 경세론(經世論)에서도 영남학파와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기호 유학은 영남 유학과 대결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기호 유학사에서 성암의 위상을 조명하자면 성암은 기호학파의 일원으로서, 항일운동과 성리학 연구를 통해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국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 왔으며 기존의 학술 논쟁들을 지양시킴으로써 국론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성암은 위정척사 노선을 견지하면서 공주부여논산 지역에 항일의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는 성암의 ‘일본정부에 보내는 편지’, ‘돈암서원에 보내는 편지’, ‘부여향교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성암은 또 성리학 연구를 통해 명덕논쟁과 호락논쟁을 지양시킬 수 있는 이론을 모색했다.  이는 성암의 ‘사상강설(泗上講說)’이나 ‘전간재(田艮齋)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성삼양설(性三樣說)로 대변되는 성암의 성리학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암은 절의와 학문을 겸비한 유학자로서, 한말 기호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성암 선생의 생애와 사상으로 보는 유학의 현대적 의미는

▲이성우(초려선생유적공원추진회장) 성암(醒庵) 이철영(李喆榮) 선생(1867~1919)은 한말 격동의 시기를 살아간 유학자이며 항일운동가다.  주요한 문헌에는 ‘사상강설(泗上講說)’, ‘항의기사(抗議記事)’, ‘내범요람(內範要覽)’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성암집(성암집)’이 전한다. 성암 선생은 유학자이며 성리학자로서 당시 학계의 주요 논쟁이었던 호락논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호론과 낙론의 주장을 조화하고 통합하는 학문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당시 호론과 낙론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과 경쟁이 심한 상황이었다. 성암은 이러한 사회적 현실위에서 어떻게 이 호락논쟁을 종합하고 논쟁을 지양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성암은 어느 하나의 논리에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관찰과 사유로 호론과 낙론의 특징을 사실에 기초해 정리하고 두 이론을 서로 통합할 수 있는 자신의 논리를 제시했다. 이러한 통합과 종합은 단순히 두 주장을 적당히 절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문헌적 사실에 기초하면서 명확한 자기 기준에 따라 논쟁 참여자의 논리를 규명하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현대사회는 경쟁의 사회이다. 경쟁에서는 논쟁이 필수이다.  그러나 그 논쟁이 자칫 자기 주장의 강화에만 경도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성암이 보여주는 통합정신은 각자가 가지는 일정한 편향을 반성하면서 논쟁의 양방을 아우르고 조화롭게 만드는 힘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암 선생이 생존한 1867년에서 1919년까지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입과 국권의 강탈을 당한 시기였다. 이때 성암 선생은 항일의 저항정신을 견지한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선생은 “나는 차라리 죽어서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 백성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특히 성암선생은 1909년 일제가 전국민의 호적을 만들려 하자 이것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계략이라고 판단하며 전면 거부했다.  성암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의거하여 복수를 못했지만 너희들의 형벌이 두려워 적국의 호적에 편입되면 임금을 잊어버리고 원수를 섬기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의리가 없이 구차스럽게 산다면 죽어서 편안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후 성암은 별세하기 전 10여 년의 시간을 항일로 일관하며 경찰서와 감옥의 투옥생활을 하게 됐다. 성암 선생의 삶에는 이익의 논리를 벗어나 오직 의리를 추구했던 유학과 성리학의 근본 정신이 잘 체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성암 선생이 국권의 침탈에 저항한 이러한 정신은 바로 유가가 중시하는 생존을 넘어선 도덕의 경지가 하나의 인격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유학과 성리학이 과연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위에서 논의한 성암 선생의 통합과 저항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정신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사심을 버리고 갈등을 조정하는 통합이며 한편으로는 이익과 생존의 논리를 벗어나 의리에 따라 저항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문학의 가치가 아닐까 한다.

●성암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지역사회의 역할과 활동이 있다면

▲이연우(초려문화재단 공동대표) 성암(醒菴) 선생은 1867년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때에 나셔서 망국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면서 통한의 세월을 살다 가신 충청(기호)유학의 마지막 유현이며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조선왕조의 몰락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 성리학자로서 유학적 가치관의 재회복으로 국권을 다시 되찾고자 노력했던 몇 안 되는 선비 가운데 한 분이셨다. 이는 조선의 많은 선비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분수를 잊은 채 사사로이 개인의 이익만 탐하며 내수의 방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의 형세가 이처럼 어려워 졌다고 성암집은 꼬집고 있다. 이렇듯 학문적으론 성리학에 머물지 않고 국난의 위기엔 지식인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성리학자로서 호락논쟁을 통한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 흩어진 민심과 사회 기강을 다시 세워 외세에 맞서야 한다는 현실론자였다. 이제 지역과 대학, 기관 및 단체들의 많은 관심처럼 실제로 성암 선생의 사상과 정신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전국적인 학술심포지엄 개최와 지역대학의 연구소 설립, 지자체의 문화재 지정, 유허지 및 사우의 역사, 문화체험장 활용 등 다각적인 교육현장 프로그램의 운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특별히 지역 문화, 예술축제장과 대학 문화마당 그리고 언론사 역사 탐방 등의 연구와 현장의 교육프로그램 운영의 병행을 제안하는 바다. 이는 지자체의 많은 관심과 참여로 가능하며 이것이 지역 정체성 확보에도 한 몫이 되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우리 역사, 문화 찾기 운동의 시대적 요구로 지역의 새로운 문화 육성, 발전 방향을 가늠하는 주요한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초려문화재단은 지역 언론사와 먼저 성암선생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대학의 연구소와 정례적인 학술대회를 통해 재평가하며 지역문화축제의 현장에서 이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것을 이미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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