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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0] 서길원 칼럼 남진의 빈잔, 그리고 대가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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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0] 서길원 칼럼 남진의 빈잔, 그리고 대가의 경지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5.04.08 0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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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고운 목소리를 고집하지 않아도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나오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도 천박하지 않고,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위엄이 어리는 모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품격이 아니다.”연주라는 표현이 과분하지만 매년 봄철이면 어버이 날 행사를 겸해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조촐한 식사와 함께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동네 어르신들은 서툴고 엇박자를 내는 연주지만 즐겁게 들어주곤 한다. 흥에 겨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기뻐하는 모습들이 필자가 색소폰을 붙들고 씨름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배우다 보면 배울수록 더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색소폰 연주다.

잘 불러보고 싶어 욕심을 내어볼수록 색소폰은 내가 원하는 고운 소리를 감추어버린다.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이 색소폰을 접하면서 새롭게 깨우친 생각이다.생뚱맞지만 색소폰의 서툰 걸음을 한 걸음씩 떼어놓고 있을 무렵 월남전에서 인연을 맺어 십수년간 형이야, 아우야 하며 지내고 있는 가수 남진이 집에 들려 경지에 이른 자의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대가의 거칠 것 없는 행동은 어깨에 부딪혀 울리는 죽비소리처럼 새로움의 경이로움이었다. 고운 목소리를 고집하지 않아도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나오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도 천박하지 않고,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위엄이 어리는 모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품격이 아니다. 정치를 하던, 사업을 하던, 예술을 하던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의 향기를 그가 보여주었다.

노 가객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처럼 자유로울 줄 안다. 집사람이 버무린 김치 한 조각에 막걸리를 들이키며 "워메! 맛있는 거!"하며 흥에 겨울 줄 알고, "워메 제수씨 음식 솜씨만 좋은 줄 알았는디 노래도 잘부르네, 계속 '님과 함께' 만 부르시요 잉" 하며 치겨 세울 줄 알고 수줍어하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벗하여 한바탕 웃어 재끼며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이 있다면 시골 읍면단위까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즐겁게 노래할 줄 아는 가객이자 풍류객이다.“나와 내 노래를 좋아해주는 팬이 있으면 그 무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느 해 작은 도시의 행사를 하면서 대가수로서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한 말이다. 모름지기 얼치기일수록 권위와 격식을 따지는 법이다. 주변에서 알량한 권력의 끝자리 한 토막을 잡고 설치는 얼치기들을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보고 살고 있기에 이런 대가들의 행위는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 감동이 되기도 한다.

‘노 가객’이라는 표현에는 ‘젊은 오빠’라 불리는 그가 손사래 치겠지만 가수 남진은 올해로써 데뷔 51년째를 맞고 있다. 반세기동안 이 노 가객은 어떤 정치인이나 사상가 못지않게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잘 알려진대로 국회의원이던 아버지의 덕분에 목포시의 최고 부잣집으로 불릴 만큼 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남진은 1964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러다 1967년 작곡자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로 비로소 세상에 ‘남진’이라는 이름을 떨쳤다.

대한민국 최초의 ‘오빠부대’가 남진이름으로 창설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기를 뒤로 하고 다음해 해병대에 자원입대, 월남전에 소총수로 참전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 한다. 요즘 정치인들이 청문회에서 즐겨 쓰는 ‘당시는 관례였다’며 충분히 기피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해병대 제대와 함께 1970년대 가요계는 남진의 세상이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마음이 고와야지)’라거나 ‘오! 그대여 변치 마오. 불타는 이 마음을 믿어주세요(그대여 변치 마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님과 함께)’ 등 그의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춤사위와 함께 전국을 휩쓸었다.

‘영원한 젊은 오빠’,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살아있는 전설’ 등 그의 이름에 앞서 붙은 호칭은 70년대 그가 남긴 발자국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다 남진은 1980년 신군부 등장과 함께 정치적 탄압을 받아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1983년 ‘빈잔’을 들고 귀국 한다. ‘빈잔’은 남진을 가득 채우며 ‘영원한 젊은 오빠’ 남진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가수’로 만든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며 불렀던 ‘빈잔’은 이제 필자의 애창곡이 됐다. ‘외로운 사람끼리/ 아 만나서 그렇게 또 정이 들고/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거/ 그대여/ 나머지 설움은 나의 빈 잔에 채워 주’ 나는 언제쯤 경지에 오를 것인가. 그리고 자유로워 질 것인가. 잔을 비워야 채워 질 텐데 아직 나의 잔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있나보다. 한 대가를 가까이 접하면서 비워지지 않는 필자의 고민은 이래저래 깊어만 간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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