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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0] 영조의 슬픔과 세자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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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0] 영조의 슬픔과 세자의 절망
  •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 승인 2015.10.21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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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길원 大記者 세상읽기]

권력을 위해, 왕조를 위해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그의 냉혹한 슬픔이 ‘꺼이꺼이’ 기러기 울음을 타고 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아내 손에 이끌려 며칠 전 영화 ‘사도’를 보았다. 극장을 나서는데 왕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버지로서의 왕의 번뇌가 지금도 잔영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에 이르기 까지 3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과 권력이 가진 숙명을 그린 영화는 왕과 세자, 그리고 세손의 대화로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다.

영화에서 배우 송강호가 분한 영조는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라며 세자를 가둔 뒤주에 쇠못을 박는다.

부왕의 꾸짖음에 세자는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라며 울부짖는다.

1762년 윤 5월 하순은 완연한 여름으로 푹푹 찌는 날씨였을 것이다. 나중에 정조가 된 세손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도 드릴 수 없사옵니까?”라고 호소하지만 할아버지는 뒤주에 갇힌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야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하라”며 회한의 시호를 내린다.

아버지는 끔찍이도 사랑했던 늦둥이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는 그릇으로 변해버린 현실에 절망했고, 아들은 그런 부왕의 눈길에 가위눌려 신음했다.

영화는 팩트와 픽션을 적절히 넘나들며 250여 년전의 비극을 극적으로 잘 드러냈다. ‘집안일’이라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왕이어야 했고, 아들은 세자 이전에 아들이고자 했던 부자간의 갈등이 결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세자, 사도세자를 탄생시킨다.

남인과 서인, 노론과 서론의 당파속에서 왕은 아들을 죽인 손으로 왕권을 지켜내며 8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왕위에 52년간 머물렀던 조선왕실의 기록적인 인물이다. 탕평책을 펴서 당쟁을 조정하고 균역법을 제정하여 민생을 돌보는가 하면 대궐 문루에 신문고라는 큰 북을 매달아 백성들의 원성을 달래고자 했던 임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천한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출생신분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복형인 경종을 암살했다는 세간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왕이다. 그런가 하면 노골적인 지역차별 정책을 폈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극적인 사도세자 사건이 일어나기 34년 전인 무신년에 소론의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가 난을 일으킨다. 충청도에서 시작된 난은 영,호남 등 전국으로 확산되고 영조의 경종 독살설은 시중에 확산된다. 난은 진압됐으나 분노한 영조는 반란세력이 영남지역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고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까지 세운다. 영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지역 출신에 대해 과거응시를 일체 중지시킴으로서 조선후기 지역차별은 영남에 집중됐다.

오죽했으면 당시 이조판서 송인명은 “영남사람은 비록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라며 지역차별의 문제를 지적했고 좌의정 김재로는 “조정에서 영남사람에 대한 대우를 다른 도와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차별의 대상 지역만 바뀌었을 뿐 오늘의 현실이 타임머신을 타고 30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기시감을 떨칠 수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당시에는 그런 문제점을 이조판서와 좌의정 같은 벼슬아치들이 진언이라도 했다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 때가 오늘날 보다 더 나은 세상이라고 평가한다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무수리의 배를 빌려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 당파싸움에 휘말려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고 즉위 초기에도 반대파 신하들로부터 ‘그대’라는 칭호의 모욕을 받아야 했던 영조는 누구보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던 군주다. 생사를 가르는 권력의 냉엄함을 알기에 아들을 위해 누군가 뒤주 틈으로 물을 갖다 줬다는 말을 듣고 그 틈마저 유약을 발라 막아버릴 만큼 비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권력을 위해, 왕조를 위해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그의 냉혹한 슬픔이 가을바람에 실려 갈잎을 울린다. 갈잎에 타고 흐르는 울음소리는 또한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 듣고 싶었습니다”라는 사도세자의 울음이기도 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는 사도세자만이 아니다. 깊은 가을이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모든 이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국매일신문] 서길원 호남취재본부장
sgw@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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