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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에서] 깜깜이 4·15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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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의 데스크에서] 깜깜이 4·15총선
  • 최재혁 지방부국장
  • 승인 2020.03.2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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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지방부국장

선거는 각 정당이 그들의 정책들의 묶음을 제시해서 유권자들로부터 더 많은 선택을 받으려고 경쟁하는 주기적 행사이다. 그런데 이런 선거가 제대로 치러져서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으려면 여러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유권자들이 각 정당이 내건 정책들의 내용과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하면 각 정당이 자신의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공급하지 않은 채 ‘불완전 판매’를 한 게 되고 유권자들도 후회하게 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선거관리위원회는 유권자들이 정치상품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도록 지원하는 한편, 가짜 정보가 유통되지 않도록 단속함으로써 그런 불완전한 판매를 막는 기능을 한다. 이는 금융위위원회가 금융상품의 불완전 판매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최근 해외금리와 연계된 고위험 상품인 DLS를 구입한 고객들이 해외의 이자율이 예상외로 떨어지게 되자 이자는커녕 엄청난 원금손실을 입자, 이를 판매한 은행이 구매고객들에게 충분히 그런 위험요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4·15 총선이 얼마 채 남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을 대면접촉하면서 자신의 정치상품을 홍보하는 선거운동이 실질적으로 멈췄다. 이렇게 되면 입지자들은 물론이고 유권자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2주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 결과를 예단할 순 없다. 선거 국면서 2주는 두 차례 정도 판세가 요동칠 수 있는 시간이다. 변수는 세 가지 정도다. 코로나19 민심과 민주당의 위성비례정당 창당, 통합당의 공천갈등이다. 어떤 변수에 중도 유권자의 마음이 바뀌느냐에 따라 선거 판도가 결정된다.

선거전이 점입가경이다. 어김없이 헛발질 게임으로 가고 있다. 유권자에게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의 선택을 다시 강요하는 형국이다. 결국 고민은 유권자 몫이다. 국가의 운명이 이념서 자유로운 30% 중도 유권자의 선택에 달렸다.

누구는 못 달아서 안달인 금배지를 달지 않겠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해찬 대표를 비롯해 원혜영 백재현 이철희 표창원 이용득 의원이, 자유한국당에선 김무성 김세연 김영우 김성찬 의원 등이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들의 불출마는 타의에 의한 불출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상당수가 4·15 총선에 출마해도 어렵지 않게 당선될 역량과 지지 기반을 갖춘 의원들이다. 이들의 불출마를 두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의 법칙을 얘기하는 이들이 적잖은 이유다. 정작 나가야 될 의원은 남고, 있어야 될 의원이 나가는 셈이니 가뜩이나 난장판 국회가 더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사람이 바뀌어도 정치와 국회가 바뀌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후진적 공천제도에 있다. 밀실에서 몇 명이 공직후보를 결정하는 우리의 공천제도는 선진국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물갈이를 해도 물이 곧 혼탁해지는 건 물의 문제라기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의원이 응당 있어야 할 곳은 국회다.

그럼에도 걸핏하면 국회를 박차고 농성 중인 당대표 주위를 배회하는 건 그가 공천권을 쥐고 있어서다. 상황이 이러니 당 의사에 반하는 행위는 정치적 자살행위요, 언제나 헌법적 가치보다 당론이 우선이다. ‘자기정치’가 사실상 불가능해 아무리 물갈이를 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인 거다. 한때 정치권에서 공천권을 당원이나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입법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곧 흐지부지됐다. 대표를 비롯한 기득권자의 벽은 높았다. 정의당은 모든 공직후보를 당원투표로 선출한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으로 후보를 뽑으니 다른 당에선 흔한 공천파동 같은 뒤탈이 없다. 의원들이 대표 눈치보는 일도 적다. 중앙당이 공천권을 내려놔야 당을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다. 각 당이 경선을 확대하는 건 바람직한 추세다. 그러나 전략공천이란 미명 하에 하향식 공천을 계속하는 한 줄세우기 정치는 필연이다.

요즈음 세상은 모두가 돈(Money)을 쫓아다니는 사회인 것 같다. 그런데 재래시장은 현상 유지가 힘겹고, 동네 가게는 설자리를 잃고 경쟁이라도 하듯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돈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사회인 것 같다. 이를 두고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들 말한다.이렇게 된 데는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히 있지만 어쨌든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일반 서민들은 살림살이가 힘들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고통받고 있다. 이런 고통은 불안을 낳고, 결국 삶을 주눅 들게 한다.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인사말이 식상할 정도로 사람답게 사는 목적과 가치가 무엇인지 물을 것도 없이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돼 버렸다. 모든 사람의 목표가 부자 되는 데 있다면 이 사회가 제대로 공존할 수 있을까?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다양함이 살아 있기에 세상인 것이다.

다양함이 살아 있는 세상,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함께 공존하며 돌아가는 세상이 살아 숨 쉬는 사회가 아닐까?그래서 나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큰 것만을 지향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작금에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고 보듬고 지켜가는 심지 굳은 사람들이 곳곳에 살아 있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비록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독특하고 고유한 기운을 가진 다양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한동네에 있는 작지만 다양한 기관과 단체, 우리 동네 구멍가게들이 어울려 공생 공존하면서 조금씩 정을 나누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우리 삶의 목적인 생명을 택하려면 작은 것에도 마음의 문을 열어둬야 한다. 우리 동네에 있는 이웃 아저씨가 손수 빵을 만드는 작지만 소박한 빵 가게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웃 마을에 있는 조그만 미용실을 어엽고 소중하게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들 모두가 고귀한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이쯤 되면 좋은 사회라는 것이 것만 웅장하고 실속은 별로 없는 화려함보다 아주 미약하고 투박하지만 작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의 빛을 우리들에게 골고루 비춰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연약한 작은 서민들에게 희망가가 되지 않을까?코로나19 신종 바이러스가 우리 주변뿐 아니라 전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위기 속에서 인류 공동의 가치는 실종되고 자국의 이익과 개인 또는 단체의 이익에만 몰려다니는 것이 안타깝다.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가는 큰 대로를 닦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절실해진다.이번 4ㆍ15 총선에서는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후보보다는 작고 나약한 것에 관심 가지고 작은 서민들의 말 한마디 충고 한마디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우리 동네 빵집 아저씨 같고 이웃 동네 미장원 아줌마같이 우리의 여린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줄 수 있는, 현명하고 정치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선정을 펼칠 수 있는 지혜로운 후보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민주당과 한국당이 국회 절대 의석을 차지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사표를 줄이려는 선거제 개혁의 본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4년 후 국회 모습이 지금과 다르려면 사람에 앞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개헌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은 고기를 잘 구으려면 불판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백재현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우리는) 물고기만 바꿨을 뿐 물을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다”고 일갈했다. 맞는 말이다. 썩은 물에 1급수 어종을 풀어놔봐야 물고기는 살지 못한다. 물을 바꾸고 불판을 바꿔야 한다.

심판은 세 가지다. 신(神)의 심판, 법원의 그것, 그리고 평범한 인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선거다. 신의 심판이야 그 경지를 가늠키 어렵고, 법원은 갈수록 정치 권력에 오염돼 믿음을 잃고 있다. ‘민주당만 빼고’ 찍자는 한 교수의 칼럼에 노발대발한 걸 보니 역시 저잣거리 사람들의 심판이 가장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혼돈의 한가운데, 이제 주인이 나라의 길을 다시 명령해야 할 때다. ‘선택할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 조화로운 사회냐, 오로지 ‘결과의 평등’이냐…. 당과 후보들은 명확히 천명하라! 그러곤 혹독한 사람들의 심판대로 올라오라.

[전국매일신문] 최재혁 지방부국장
jhchoi@jeonm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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